한해의 말미에, 올해 들었던 상념 하나를 적어놓은 노트를 꺼내놓는다.
#1 방황
"그리하여 나의 방황은 시작되었다..."(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중)
별 거 아닌 것 같은 문장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나는 스스로 품은 신념에 찬 진지한 표정으로, 혹은 세상과의 불화로, 혹은 내면의 목소리와 다른 현실의 벽에 직면하여 방황하는 영혼들에 매료되어 왔다. 나 역시 방황하였고 이는 불안을 낳았지만 일말의 낭만도 가슴 한편에 흐르는 이중적인 감정.... 이를 끌어안았던 것 같다.
이제, 삼십대가 저물어간다.
그리고 방황할 수 있는, 방황이 용인되고 낭만일 수 있는 나이가 지나가고 이미 상당히 지났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감은 슬프다. 방황할 수도 멈출 수도 돌아갈 수도 단단히 뿌리내릴 수도 없는.
#2 consummate
일상을 무너뜨리고 싶을 때가 있다.
배회하더라도, 자신을 온전히 몰아넣고 불연소 없이 소진시킬 수 있는 일, 활동, 창작, 무언가. 그것을 찾았고 찾는 과정이며 그 순간에 들어가 하나둘 행하고 있는 사람만큼 행복한 이가 있을까.
일상주의는 어디까지 힘이 있을까.
일상을 탄탄히, 소중히 여기며 가꾸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한다. 나는 일상의 제작자, 픽서(everyday maker, fixer)의 꾸준한 존재가 그 누구보다 사회를 지탱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컨대 고흐와 같이, 체게바라처럼 격정의 짧은 세월을 살다 간 명멸의 영혼에 진하고 깊이 매료되는 순간.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거사에 나갈 때마다 생각하오. 죽음의 무게에 대해....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하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리 선택했소.” (드라마 '미스터선샤인', 애신의 말)
“그냥 곱게 사그라들었으면 좋겠어요.”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영희의 말)
다른 방향으로 뻗은 리비도의 발현이겠지만, 모두 일상적 루틴을 무너뜨린다. 지금과 오늘이 다인 것처럼 파고들어 몰입하는 순간. 영어 단어로는 컨수메이트(consummate, 대학원에서 인연 맺은 한 교수님이 좋아하던 표현인데, 인상적이라 담아두고 있는 단어), 번아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나를 제대로 갈아 넣어 남김없이 내어놓고 기투하는 그 진한 생의 순간. 워라벨은 한 편의 대안이다.
반복과 정체가, 일말의 안정마저 무표정한 죽음과도 같을 때. 근래 고민해온 나의 문제는 이것이다. 멀티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다. 컨수메이트한 순간도 있지만, 쌓이거나 모아지지 않고 분절되는 느낌이다.
그렇게 여전히 분열되어 있고 적당하고 애매한 합리화에 갇혀 있다. 방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