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파리 오르세 미술관, 나를 응시하는 슬픔에 대해
"난 슬픔 속에서 기쁨을 느껴요. 슬픔이 웃음보다 더 좋죠. 그리고…. 천사는 슬픈 이들 가까이에 있고 때론 병이 우릴 치료해 주죠."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 고흐가 가셰 박사에게 한 말)
가을이 오면 그 얼굴이 생각난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비탄으로 한 시간 넘게 나의 발걸음을 사로잡은 우울의 표상. 슬픔이 아니고서는 미를 발견할 수 없을 때, 그런 우울했고 흔들리던 시절에 파리로 떠나 홀로 거닐었다.
첫째 주 일요일은 파리의 주요 미술관이 무료입장을 허용한다. 지하철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역에 다다르자, 이곳의 하고많은 대작 중에서도 대표작, 입구의 거대한 광고판에 내걸린 서글픈 명작의 분신이 입장 전부터 혼자 떠나온 발길을 처연하게 멈춰 세운다. 반 고흐의 자화상.
오르세 미술관은 이 예술의 도시에 오면 1, 2순위로 들러야 할 곳으로 유명하다. 기차역이었던 곳을 개조한 웅장한 공간.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20세기 초반의 작품이 밀집해 있다. 특히 벨에포크(1890~1914)라 불린, 파리에서 예술이 절정으로 꽃을 피웠다는 시절의 유수한 작품을 걸을 때마다 숱하게 만날 수 있는 곳.
고흐의 자화상 속 눈빛은 왜 서글픈 가을비와 같은 우수에 흠뻑 젖어 있을까. 이곳 오르세에서 가셰 박사(고흐가 죽기 전 두어 달 같은 마을에서 치료받고 교류했던 정신과 의사)의 초상을, 손을 턱에 괸 채 가셰같기도 고흐 자신의 투영 같기도 한 흔들리고 초점을 잃은 눈빛을 바라봤을 때, 그리고 런던 코톨드 갤러리에서 살의에 찬 아픔과 아직 남은 생을 향한 결의가 슬프게 혼재해 있던 ‘귀를 자른 자화상’을 볼 때도.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그 비애의 절정을 보고 있다. 수많은 여행자, 파리지앵, 군중 속에서 홀로 우두커니 선채, 나 역시 우수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잃은 채 오직 한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예술적 광기와 현실의 궁핍이 뒤섞인, 상처받고 소외된 가녀린 영혼에 이끌려 들어가는 순간.
그는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는다. 흔들리고 엇나가는 시선 처리에 그의 불안정한 심리를 그대로 받아 안는 듯하여, 나의 내면도 시리게 동요한다.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앓았을까. 우울이 표면을 넘어 가슴 깊숙이까지 자리하면 저런 표정이 나올까. 격정과 눈물은 오히려 생의 감각과 불씨가 남아 있는 표징일까.
'나도 좀 어울리고 싶다. 함께 앉아 한잔하며 무슨 대화든 나누고. 내게 담배 한 대 건네줬으면. 와인 한잔이나. 아니면 안부라도 물어 줬으면. 그럼 대답하고 이야기 나눌 텐데. 그리고 가끔씩 스케치를 그려 선물해주면 받고 어딘가에 두겠지. 여자가 미소 지으며 물을 지도. 배고파요? 먹을 것 좀 드려요? 햄이나 치즈. 아니면 과일...'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 첫 장면 독백)
옅은 청록색과 쑥색이 망상처럼 혼미한 배경에, 수척하고 움푹 들어간 초췌한 눈매를 하고 있다. 복잡하고 어두운 상념은 배경의 혼란함으로, 어둠이 짙게 지배하는 얼굴은 그의 맥없이 음울한 눈빛과 어우러져 극도의 패닉 상태를 표출한다. 슬픈 듯 멍한 듯 무표정한 듯…. 누구도 아닌 자신을 앞에 세워두고 그린 민낯, 덫에 걸린 것처럼 헤어 나오기 힘든 지독한 우울에 대해.
(실제 이 작품은 그가 계속되는 정신적 고통, 망상, 발작에 시달릴 때 그린 것으로 알려진다. 병이 심각해지자 고흐는 1889년 남프랑스의 생레미(Saint Remi)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여기서 이 그림을 그렸다. 병원에서만 6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가장 격렬하고 혼미스러운 상태를 표출한 것이 이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꼭 슬픔, 절망,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를 처절히 응시하며 내뿜는 어떤 표출, 마치 이런 것.
"뭔진 모르지만 제 안에 뭔가가 있어요. 저만 볼 수 있는데 그게 때론 무서워요. 정신이 나가나 봐요. 그럴 때면… 저 자신에게 말하죠.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자."(위 영화에서 고흐의 말 중)
한국말 소리가 들린다. “이거 유명한 작품이잖아.” 한 마디씩을 던지며 하나 둘 지나가고, 스마트폰으로 몰래 슬쩍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서서 그를 바라본다. 어느 순간, 코끝이 시큰하게 달아오른다.
고흐는 왜 그렇게 자화상을 많이 그렸을까.
자기 모습을 제대로 그려야 다른 것도 잘 그릴 수 있거든. 또 같은 인물이라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초상화가 나올 수 있단다. (여동생 빌의 물음에 답하며)
사람들은 말하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 자기 자신을 그리는 것 또한 어려운 일…. 자화상은 일종의 자기 고백과 같은 것이야.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왜 지금 이 글을, 멀리 떠나와서 자기 넋두리에 불과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있는가. 디지털 기기를 떼어내고 구겨진 수첩에 구불구불한 손글씨로 눌러 적고 있는가. 얼마나 자화상 앞에 서 있었는가. 시린 공감의 순간을 뒤로하고 애써 발걸음을 떼며, 나의 자화상을 손으로 썼다. 이번 여정에서 동행 중인 책 속의 문장처럼.
"내 생존을 용서받기 위해 글을 쓴다는 광적인 계획, 그것은 허풍과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어떤 현실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의 우울한 작업인 글쓰기는 아무것에도 귀착하지 않았다. 그러자 재빨리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썼다. 나는 지금 와서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만일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남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했을 것이며, 나는 다시 놀라운 어린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진지하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말')
After Orsay
미술관을 나와 서쪽으로 걸었다.
폰데알마역(Pont de l'Alma)에서 세느강변을 따라 에펠탑 쪽으로 오다 보면 만나는 첫 번째 다리(드비이 육교, Debilly Footbridge)에서 에펠탑을 바라본다. 강 너머로 해가 떨어지고 있다. 오늘도, 노랗고 불그스름한 해질녘 ‘비포선셋’의 파리는 절경이구나.
다시 골목(Rue Saint Dominque)으로 들어가서, 별다른 지도나 앱의 안내 없이 높이 솟은 에펠탑을 바라보며 걷는다. 파리를 상징하는 인공 철탑을 바라보는 명소가 여기에 또 있었구나. 느지막하게 기운 오후, 떨어지는 주황빛 해와 더불어 발그레한 온화함을 품은 거대한 에펠탑이 눈앞으로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