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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주민 Mar 20. 2024

어제를 향해 걸어가다

00년대 노래 들으며 고흥으로 시간여행... 순수의 시절(?)은 있었을까

지역자산화협동조합 총회가 있어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갔다.

(나는 이곳 소속으로 고흥에서 지역사회혁신 프로젝트인 어촌신활력증진사업을 추진 중이다. 남쪽에 기거하며 주로 있고 가끔 올라오다 보니, 요즘 나는 ‘5촌2도’나 ‘6촌1도’ 정도로 사는 셈. 지역민으로 지내다가 간혹 (대)도시가 그리울 때 여행자처럼 서울에 입성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


금요일 일정 보내고 다음날, 예전 진료기록이 필요한 일이 있어 흑석동에 있는 다녔던 대학의 병원에 갔다. 간 김에 오래간만에 학교도 둘러봤다. 수업시간 늦어서 헐레벌떡 뛰어오르던 후문 길을 반도 끝에서부터 몰고 온 차로 운전해 들어서니, 고흥서 서울로 올라온 거리만큼이나 그 시절이 저만치에서 아득하게 느껴졌다. 하기야 이제 난 스물을 2배한 나이가 되었지.


주말이라 다소 한산했지만, 개강 시즌 캠퍼스는 활력이 넘실거렸다. 졸업식 때 못 왔는지, 뒤늦게 학사모와 검정 가운을 입고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무리의 웃음소리도 울러 퍼졌다. 새로 지은 건물들은 이곳이 확실히 내가 다닐 때보다 현대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심지어 중앙도서관으로 오르는 계단에 에스컬레이터도 생기다니. 양쪽으로 수풀이 우거져 휘날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걸어 오르던 층계, 유명한 시트콤의 배경이기도 했던 곳, 물론 편리해졌지만 운치는 조금 떨어진 듯도 싶었다.


배고프다! 정오 무렵 정문 앞에 늘어선 상권 거리로 갔다. 바로 보이던, 2차로 자주 가던 우리 과 단골 반지하 맥주집이 사라졌구나.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하나 둘 셋, 넷... 확 늘어난 모습이었다. 골목으로 들어서니, 사라진 밥집들 사이로 익숙한 이름! 여전히 남아 있는 ‘단비’를 발견했다.


분식부터 찌개, 덮밥류까지 메뉴판에 있는 전형적인 대학가 앞 밥집이다. 떡볶이, 계란샐러드를 포함한 내주는 반찬이 십수 년 전과 그대로다. 옆자리에는 그 시절의 나와 같은 약관의 친구들이, 나의 동기가 매번 시키던 제육덮밥, 내가 자주 시키던 순두부찌개를 시켜두고 먹는다. 토요일 점심, 꾸미지 않은 채 자취방에서 나와 슬리퍼 신고 와서 밥을 먹는 젊은 친구들도 그대로다.


이곳마저 없었다면, 나는 기억을 소환할 수 있을까. 불현듯, 그립다. 그 시절의 나도. 너도. 우리들도. 불혹이 된 나의 입맛에 단비의 떡볶이는 달았지만 이게 또 청춘의 맛이지. 그마저도 반갑다.


그리워진 김에 다시 캠퍼스로 돌아와 과방이 있던 서라벌홀에 들어갔다. 오래된 건물인데, 리모델링을 해서 산뜻해졌다. 그리고 사라진 것들 속에서 남아있는 것. 새것으로 바뀌어간 틈에 한쪽으로 놓인 낡고 해진 사물함, 나도 전공책을 넣어두고 쓰던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나의 전에도, 그 이후로도 얼마나 많은 손길이 스치고 스쳐서 지금에 이르렀을까. 나의 자리에는 오늘 어떤 후배의 물건이 들어가 있을까.


허름하나 여전한 것들이어서 시간을 넘어 무언의 연결을 느낀다.


#어제를향해걷다


서울에서 고흥으로 내려갈 때, 반대로 고흥에서 서울로 향할 때 나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분명, 두 곳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수도권과 반도 끝의 거리만큼이나 상당한.

고속도로 타고 남으로, 남으로 달려간다!!


확실히 서울에 가면, 꼭 강남이나 도심이 아니더라도 건물의 ‘때깔’부터가 다르다. 인구와 수요, 자본이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보니, 새것과 트렌드가 상시 촘촘하게 입혀지고 있는 공간일 터(물론 서울 살 때는 내가 속한 일상인지라 잘 인지하지 못했다). 서울이 2024년 오늘의 유행을 반영한 도시 분위기라면, 남쪽으로 달려 순천쯤 오면 2010년대, 고흥에 당도하면 2000년대 이전으로 시간을 건너와있는 느낌이랄까. 수도권과 멀어질수록 속도와 유행은 밀도 낮게, 듬성듬성 침투해 있다.


그래서, 서울에서 고흥으로 내려갈 때는 시간을 되돌려 향하듯 90년대, 00년대 예전 노래를 골라 듣는다. 나는, 지금, 어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간 지나고 나서 보니 계절이 다시 오니, 그리워하다 미워하다 지워버리지 뭐....”


“이러다 니가 죽든 내가 죽든

이건 무슨 사람 사는 게 아니야

여기든 저기든 어디든지 간에 뭐 하든지 간에

무조건 너만 생각나네...” (벌써 이렇게, 쿨)


아! 00년대 언제였던가, 이별의 진통을 삭히며 들었던 노래가 오늘의 나의 가슴에도 다시 진하게 닿는구나. 고속도로를 탄 차는 막힘 없이 쌩쌩 남으로 향하고, 과거로 덩달아 내려가는 이 감성, 몽환감, 싫지 않다.


이건 뭐랄까, 단지 추억팔이나 과거미화의 감정은 아닌듯하다. 나에게 다시 명징하게 다가오는 잊힌 그러나 누적된 생의 단층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경험과 실재하는 감각. 그 어떤 ‘인스턴트’가 덜한 순수함(?) 같은 걸 품은듯한 예전 노랫말을 들으면서 고흥읍에 당도하면, 80,90년대로 돌아간듯한 허름하고 작은 버스터미널에서 나를 키워준 할머니를 닮은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사 들어온 연식 오래된 연립주택 계단을 오르다 이웃을 마주한다. 인사하고 안부 묻는 밀도와 분위기가 심드렁함이 디폴트였던 서울 살 때와는 정서가 다름을 느낀다. 알게 된 주민 분은 언젠가 닭장으로 만든 떡국을 손수 끓여 건네주었는데, 아! 이것은 잊혔던 맛이다. 전라도지역 스타일로 닭을 ‘조사서’(잘게 쪼개서) 간장, 마늘 등으로 양념해 떡국 육수를 냈다. 할머니가 늘 해주던 닭장 맛과 어쩜 이리 똑같을까. 


그분이 돌아가신 후 이 토속을 전하는 맛이 단절되어 오래 맛보지 못했다. 한 수저 떠서 맛보는 순간, 따뜻했던 할머니의 손길, 그 품에서 받아먹던 나의 어릴 적이 재현되며 울컥, 범람하는 추억 속으로 잠겨 들었다.

고흥 전셋집 옥상에서 바라본 읍내 풍경
닭장으로 육수를 낸 전라도식 떡국. 한 수저 뜨자마자 할머니 생각이 나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흥 전통시장에 있는 식당. 허름하지만 푸짐하고 정이 넘치는 곳. (게다가 백반 단돈 6천 원!!)


최남단의 읍내 시가지를 걸으며, 낡고 변하지 않은 ‘응답하라...’ 속 올드패션 글귀, 간판 스타일과 해진 벽돌로 이뤄진 건물을 바라본다. 그러나, 촌스러운(러스틱rustic 어쩌고 표현하며 낭만을 불어넣는 경우도 물론 있지) 것도 남아있어야 하지 않을까. 첨단의 시간이 꼭 준거점일 수 있을까. 때로는 흘러간 노래에 깊숙이 잠겨 들어가듯, 지금은 소멸한(줄 알았던) 과거의 것이 내재된 취향을 진하게 건드리기도 하지 않을까.


그렇게, 어제를 향해 걸어갈 수도 있음을. 지역에 살며 느낀다.

퇴행의 경로가 아닌 잊히거나 미지했던 영역으로 향하는, 여전하게 남겨진 것들을 모험과도 같이 찾아 나서는 길. 시류에 따라 변화하더라도 버티고 묻어서 잔류해야 할 것. 단절보다는 연결되어야 할 것. 소멸하지 않아야 할 것. 재발견하고 적응시키면서 바꿔나가야 할 것. 잃어버리고 망각하고 멋모르고 지나쳐 버린 것을 향해.


그런 것들을 담고 적어보려 한다. 빼곡한 서울에서 밝을 때 출발하여 해 떨어져서야 당도했다. 어스름 내린 고흥에서, 머나먼 거리만큼이나 시간을 관통해 거슬러 온 듯한 반도 끝 로컬에 놓여서 시차적응하며 든 생각.


to be continued

구례의 '호호의숲'에 들렀을 때, 제목이 로컬살이를 반영하는듯한 느낌이 확 와서 바로 구매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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