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로봇기술 등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으로 이뤄지는 차세대 산업 혁명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그중 '융합'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은 다양한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기존의 산업과 서비스에 결합하여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데 핵심이 있다.때문에 4차 산업이 가져올 미래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계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흐름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여기저기 탐탁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띤다. 현재 정부에서는 다각도로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 발을 맞추고자 대통령 직속의 4차 산업혁명 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당장 서점을 들어가면 4차 산업혁명을 주요 키워드로 하는 서적들이 베스트셀러의 상위 칸들을 차지하고 있다. 지자체와 정부기관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집하는 공모전을 내놓고, 하물며 교육계에서도 4차 산업혁명에 발을 맞추겠다는 명목 하에 코딩, 드론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한 번은 우연히 지역의 농축산업을 홍보하는 지차체의 TV 광고를 본 적이 있었다. 지역의 농민들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이 광고의 다짐 중 하나는 4차 산업혁명을 통한 농업의 진흥이었다. 의무소방원으로서 훈련을 받기 위해 중앙소방학교에 있을 당시, 우리를 담당하는 교관 중 한 명은 아예 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앞으로 바뀌게 될 소방의 미래를 강의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 우리 사회는 현재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중이지 않을까. 곳곳에서 쓰이는 이 단어를 보다보면 없던 거북함까지 생길 정도다. 여기에는 4차 산업혁명을 마치 무엇이든 이뤄줄 수 있는 마법의 램프처럼 생각하는 우리 모두의 착각이 원인으로 작용한다. 우리 모두 4차 산업혁명이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환상 속에서 열심히 돼지꿈을 꾸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미래는 단지 무궁무자한 가능성의 세계일뿐이다. 가능성의 세계는 성공을 내포하고 있지만 실패 역시 존재한다. 우리는 기술의 융합이 가져올 사회 전반의 변화를 모두 예상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 이로울 수도, 혹은 해로울 수도 있다. 우리가 상상한 그 이상일지도, 혹은 생각보다 훨씬 초라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가능성을 향한 막연한 낙관은 오히려 해롭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을 보다 신중하게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지겹도록 언급되는 ‘혁신’이란 단어가 바로 그 대답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에서도 우리의 오해와 편견이 틈입한다. 인공지능 기술을 예로 들어보자. 알파고가 이세돌을 바둑 대국에서 승리한 건 분명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건 그 자체로 혁신이 될 수는 없다. 혁신은 단순히 기술적 성과를 이르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전에 따르면, 혁신이란 묵은 관습이나 조직, 방법 등을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새롭게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이때 여기서 말하는 ‘관습’은 기호학적 관점에서는 ‘코드’다. 다시 말해,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알파고가 승리한 그 이후다. 이제 기계는 인간의 일손을 덜어주는 하급 도우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능가할만한, 어쩌면 이미 능가해버렸을 지도 모르는 막대한 지성을 갖춘 위력적인 존재다.
알파고의 승리는 단순히 인공지능이 인간을 상대로 게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넘어 기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 자체를 바꿔버렸다. 최근 SKT에서 런칭한 인공지능 서비스 NUGU의 광고를 보면 인공지능과 대화하며 하루를 보내는 할머니들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또 다른 광고에서는 외로운 기러기 아빠가 인공지능 스피커인 아리와 대화를 나누며 소통하는 모습을 통해 마치 한 가족인 것 같은 착각을 안겨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풍경은 우리에게 낯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어쩌면 조금 먼 미래에는 당연한 일상일 될지도 모른다. 이렇듯 진정한 혁신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해야 한다. 다시 말해 코드를 생성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창조, 즉 혁신을 보다 쉽게 설명해주는 문화학적 개념이 바로 아비투스Habitus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제창한 이 개념은 습관(Habit)의 어원이기도 하다. 우리의 습관은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 중에 나타난다. 또한 습관은 사회적 차원에서, 혹은 개인의 경험적 차원에서 생성되고 구조화 된다. 가령 우리가 길을 건너기 전에 주위를 먼저 살피는 이유는 그렇게 행동하도록 배웠거나, 그러지 않아 사고를 당할 뻔 했던 개인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비투스는 이러한 습관이 확장된 형태다. 다시 말해 아비투스는 사회성과 개인을 연결시키고, 실천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일종의 엔진인 셈이다.
우리는 아비투스를 통해 사회구조와 구성원들의 생각의 틀을 이해할 수 있다. 아비투스는 하나의 사회 속에서 구성원들이 행동하고, 느끼고, 인지하고, 존재하도록 만든다. 구성원들은 습관의 형태를 통해 사회현상을 지각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비투스는 개인의 코드화 능력과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러한 아비투스를 핸드폰의 디자인에 한 번 적용해보고자 한다. 1980년대 처음 등장한 브릭폰에서부터 오늘날의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핸드폰의 디자인은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우리는 그 변화 속에서 사회를 바꾸어낸 패러다임, 곧 ‘아비투스Habitus’를 찾아낼 것이다.
기호학적 관점에서 하나의 오브제(Object)는 사용자의 습관을 재현하고, 사용자와 오브제의 의미작용을 현상을 분석할 수 있는 기호학적 대상이다. 말하자면 오브제 안에는 인간이 추구해온 문화적 가치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셈이다. 한편 이러한 오브제는 디자인을 통해 생산되고 유통된다. 때문에 기호학적 관점에서 디자인은 곧 오브제의 세상을 창조하는 개념이자, 사용자인 인간과의 능동적인 의미작용 활동을 유도하는 문화적 툴이다. 일종의 컨베이어 벨트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인간과 오브제는 디자인이 만들어낸 통로를 통해 상호작용하고 소통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Habitus가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코드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디자인은 습관을 빚고, 그 습관은 기호(패러다임)를 만든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핸드폰 디자인에 우리의 기호학적 관심을 두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