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치지않아#손재곤#2020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북극곰을 연기하던 서원장은 결국 폐소공포증으로 인해 탈진한다. 수의사 소원은 태수에게 더 이상 연기를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한다. 이에 태수는 별 수없이 자신이 대신 북극곰 탈을 쓰고 연기를 하겠다며 사무실 밖으로 나선다. 태수가 떠나고, 서원장은 소원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까만 코, 캐나다에 보냈어야 했어. 좀 쉬고 싶은데 꼭 한 두 명이 어디 가지도 않고 째려보더라고. 무슨 감옥살이하는 것도 아니고, 미치겠더라고....”
벌써 2년이 흘렀다. 지난 2018년 9월,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는 퓨마가 탈출했다. 4시간 반에 걸친 추격전 끝에 퓨마는 결국 사살된 채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분노했다. 청와대의 국민청원란에는 해당 사건과 관련하여 담당자의 처벌과 동물원 폐지를 요구하는 글들이 잇따랐다. 사실 우리에 갇혀 있었어야 할 퓨마가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사육사가 문단속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초 발견 당시에 퓨마는 배수로에 납작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었으며, 사살당하기 직전까지도 동물원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국은 날이 어두워지면 추적이 어렵다는 이유로 마취총 대신 실탄을 끼워 넣기로 결정했다. 심지어 동물원에서 운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시설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정황까지 나왔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전적으로 인재(人災)였던 셈이다. 인간의 실수로 발생한 사고 때문에 평생을 인간의 욕망에 이용당한 퓨마는 인간의 안전을 위해 살해당했다. 퓨마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을 위해 희생하기를 강요당한 것이다.
영화 <해치지 않아>를 보고서 불현듯 이 사건이 떠오른 건 대관절 무슨 이유일까. 그건 어쩌면 이 영화가 품고 있던 어떤 아이러니 때문일 것이다. 그 아이러니가 우리 모두가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해치지 않아>가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일단 이 영화, 재미가 없다. 코미디 영화라는데 웃기지가 않다. 사람이 동물 탈을 쓰고 연기를 한다. 그게 이 영화의 유일한 유머 소재다. 제작사가 이전에 만들었다는 <극한직업>과 비교하면 한숨이 나온다. <극한직업>은 잠입수사를 위해 차린 치킨집이 맛집이 되었다는 설정에다가 대사, 액션, 대책 없는 러브라인까지 끌어오며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반면 <해치지 않아>가 웃음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딱 하나. 배우들의 어색한 동물 연기뿐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설정도 두 시간 동안 그것만 반복하면 지루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해치지 않아>는 코미디로서 분명 실패한 영화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해치지 않아>는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바로 ‘까만 코’의 이야기다. 까만 코는 정형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동물원에서 받은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이 망가져버린 것이다. 그런 그가 좁아터진 사육장을 빠져나와 그나마 넓은 방사장을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오로지 관람객들이 모두 떠난 밤 시간뿐이었다. 그런 까만 코를 두고서 북극곰을 연기하던 서원장은 까만 코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며, 기회가 있었을 때 캐나다로 보내야 했다며 씁쓸하게 말한다.
태수와 함께 밤의 동물원을 거닐며 소원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준다고 노력해도, 동물들에게 동물원은 그냥 시멘트 감옥이죠.” 맞는 말이다. 동물원의 주인은 동물이라고 모두가 생각하지만 사실 태수의 말마따나 동물원의 진짜 주인은 그것을 운영하는 기업이고, 돈을 내는 관람객이 없다면 동물원은 존재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동물원의 진짜 목적은 돈이다. 보호니, 학술용이니 그냥 듣기 좋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 증거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동물원과 수족관에는 놀이공원이나 서커스 같은 위락시설이 늘 함께 한다.
동산파크의 직원들은 각자 동물을 연기하며 동물들의 고충을 이해한다. 하지만 태수가 북극곰을 연기하던 도중 갈증을 참지 못하고 콜라를 마시던 게 관람객에게 들키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콜라를 마시는 북극곰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관람객이 몰려온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 영화가 가진 불편한 진실이 고개를 쳐든다.
불과 얼마 전까지 동물들의 처지를 공감하며 안타까워하던 직원들은 한순간에 입장을 바꾼다. 아무리 사람이 들어가서 연기를 한다지만, 북극곰이 콜라를 마시는 행위 자체가 말도 안 되고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수의사 소원은 관객들의 호응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며 쇼를 진행한다. 고릴라를 연기하는 건욱도 일부러 과장된 연기를 하며 고릴라의 이미지를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한다. 이 모든 건 동물원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영화 속에서 북극곰이 콜라를 마시고, 고릴라가 차력쇼를 선보이는 것은 서커스와 다를 게 없다. 동산파크의 직원들은 그들이 동물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던 과거를 그대로 답습하며 돈을 벌었다. 더 웃긴 건 이 영화의 악역이 (비록 자신의 이익 때문이긴 했지만)동물원을 없애려는 황 대표라는 것이다. 동산 파크의 직원들은 환경파괴와 폭력을 일삼는 락원과 황 대표로부터 동물원을 지켜달라며 서명운동을 하지만 그들이 얼마 전까지 동물원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던지던 것을 떠올리면 어처구니가 없다. 애초에 그들이 구하려는 건 동물원과 동물들이 아니었다. 당연히 환경을 지키려는 것도 아니다(오히려 진짜 환경운동가는 락원의 대표인 민채령이다. 적어도 그녀는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회원이었다). 그들이 구하고자 했던 건 그냥 자신들의 직장이었다.
영화의 후반부, 사고로 방사장에 나온 까만 코는 사람들 앞에서 난동을 피운다. 그 바람에 멋모르고 방사장에 들어선 황대표와 그를 구하기 위해 들어온 태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사람들을 그 와중에도 소리를 지르고 이를 핸드폰으로 담으며 일종의 공연처럼 소비한다. 정작 우리 안에 던져진 사람과 동물은 서로 목숨을 걸고 있는데도 말이다.
수전 손탁의 <타인의 고통>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우리는 모두 관음증 환자다.” 그녀에 따르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의 고통을 소비한다. 정확히는 타인의 고통을 동정하고 연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소비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동정과 연민에는 힘이 없다.
우연히 튼 텔레비전에서 화재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방영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그 모습에 마음 아파하다가도 채널을 돌리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에 방금 본 괴로운 광경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웃기에 바쁠 것이다. 바로 이게 우리가 고통을 소비하면서 갖는, ‘불쌍해’라는 말로 대표되는 동정과 연민의 한계다. 하지만 지금 죽어가는 사람들이 당신의 가족이라면 어떨까. 당신은 채널을 돌리지 못할 것이다.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제발 그들을 구해달라며 울부짖을 것이다.
호롱이가 사살된 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탈출을 방조한 직원들에 대한 처벌과 동물원에 대한 폐지 요구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던 것도 벌써 어렴풋하다. 그 사건 이후 담당 직원들이 처벌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보도가 제대로 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한 대전오월드는 한 달 정도 잠정 폐쇄되었을 뿐, 이후 보란 듯이 운영을 재개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모두가 호롱이의 고통을 동정과 연민으로만 소비했기 때문이다.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호롱이는 우리 모두가 죽인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