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선이어폰과 언택트
코로나19로 인해 한 학기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결국 이번 학기는 전면 인터넷 강의로 대체되었다. 고로 나는 오늘도 카페에서 인터넷 강의를 듣는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저마다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을 부여잡고 부지런히 노트에 무언가를 옮겨 적는다. 그때 진동벨이 울렸다. 아까 주문했던 커피가 나온 모양이다. 별생각 없이 일어나 커피를 가지러 갔다. 그 순간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스마트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액정이 깨졌을까 걱정할 새도 없이 나에게로 모여든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 민망해. 그러고 보니 이거 무선 이어폰 아니었지?
바야흐로 무선이어폰 전성시대다. 애플의 에어팟, 삼성의 버즈, LG의 톤플러스, QCY, 프리버드 등 떠오르는 브랜드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다. 헤드폰에 넥벤드형 이어폰까지 더하면 종류는 훨씬 다양하다. 이제는 지하철이나 거리에서도 유선 이어폰을 착용하고 있는 사람이 더 어색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2016년 애플의 에어팟이 처음 등장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오늘날의 이런 풍경은 다소 의아하다.
유선 이어폰에 비해 떨어지는 음질, 분실의 위험성, 조작감, 배터리 문제 등등에다가 독특한 디자인으로 인해 ‘콩나물 대가리’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실제로 애플에서 밝힌 2019년 4분기 실적을 살펴보면 에어팟 프로 등이 포함된 기타 상품 매출은 100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이는 전년 대비 무려 37%가 증가한 수치다.
그렇다면 무선 이어폰의 흥행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우선 기술적으로 지적되었던 무선 이어폰의 단점들이 해결되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음질 같은 경우, 유선 이어폰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시중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유선 이어폰에 비하면 뒤떨어지진 않는다. 배터리 용량도 상당히 늘었고, 조작감도 스마트폰과 연동해 조작을 가능하게 하면서 많이 개선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무선 이어폰만이 가진 특별한 장점 때문이다. 무선 이어폰은 블루투스 기능을 사용하기 때문에 유선 이어폰과 달리 선이 없다. 언뜻 보면 단순한 차이지만, 그 차이가 사람들에게 수많은 편리를 가져다준다. 바로 ‘연결되지 않을 자유’다.
무선 이어폰이 등장하기 이전에, 유선 이어폰을 쓰던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주머니에 넣어 놓았더니 선이 잔뜩 꼬이는 바람에 푸느라 고생을 했던 경험,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다가 선이 무언가에 걸려 연결이 끊어진 경험, 관리를 소홀히 했더니 선이 망가져 이어폰 한 쪽이 들리지 않던 경험 등등. 하지만 무선 이어폰을 사용한다면 이러한 불편을 겪을 필요가 없다. 선이 없기 때문이다. 꼬인 선을 풀 필요도, 어딘가에 걸릴 위험도, 선이 망가질 걱정도 없다. 그냥 배터리만 꼬박꼬박 충전하면 된다.
어쩌면 이것도 소위 말하는 언택트 기술일지도 모르겠다. 언택트 기술이란 대면적인 접촉 등을 최소화하여 고객에게 개별적이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술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대형 쇼핑몰에서 볼 수 있는 키오스크, 자판기, 무인 택배함 등이 있다.
이러한 언택트 기술이 유행하게 된 데에는 크게 3가지 이유가 배경으로 작용한다. 일단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과거엔 대면적인 접촉을 통해 제공과 소비가 가능했던 서비스들이 굳이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가능해졌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는 불경기의 지속과 인건비 상승이다. 2017년 국세청 발표에 따르면 2017년 한 해 48만 개의 가게가 새로 생겼고, 42만 개의 가게가 폐업했다고 발표했다. 10곳이 문을 열면 그중 9.2곳은 문을 닫는다는 소리다. 장기 불황으로 인한 매출 부진과 최저임금 상승 등으로 많은 매장들이 실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언택트 기술을 활용한 무인화 기기는 하나의 돌파구가 된다. 인건비를 덜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KFC와 버거킹 등은 모든 매장에 이러한 무인화 기기를 2018년 도입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대해 피로와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트렌드모니터’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5.9%가 점원이 말을 거는 것보다 혼자서 조용히 쇼핑을 즐기는 게 더 좋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이유로 과거에는 쇼핑을 할 때면 옆에 점원이 붙어 옷에 대해 설명하고 추천하는 게 일반적인 풍경이었다면, 오늘날엔 고객이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 점원도 나서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혼자 사는 여성의 경우, 범죄 노출에 부담을 느끼기 쉽기 때문에 음식 배달이나 택배 서비스를 이용할 때 직접 대면하지 않고 물품을 수령하는 방법을 더 선호한다.
나는 그중에서도 무선 이어폰의 유행에는 세 번째 이유가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사람들은 가족, 친구, 학교, 직장 등 수많은 타인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예전에는 이러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데 일정 부분 이상의 에너지를 쏟는 게 당연했지만, 오늘날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내가 투자할 수 있는 여력과 얻을 수 있는 효력을 따지며 관계에서조차 가성비를 고려한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인간관계가 피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8년 서점들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살펴보면 <신경 끄기의 기술>,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 같은 인간관계에 관한 책들이 상위 칸들을 차지했다. 한 취업 포털 사이트에 따르면 직장인 중 93.5%가 직장 동료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5명 중 4명은 회사 안에서 외로움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놓느냐, 마느냐. 이렇듯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관계가 주는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하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추구한다. 바로 ‘느슨한 관계’다.
‘느슨한 관계’란 무엇일까? 느슨한 관계는 단순히 개인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개인주의와는 조금 다르다.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느슨한 관계의 개인은 필요한 경우 타인과 조직적인 연대와 협력을 통해 목표를 완수한다. 하지만 그 외의 경우라면 타인과 철저히 분리되어 개인만의 시간을 보장받기를 원한다.
이러한 느슨한 관계의 단면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게 바로 SNS다. SNS는 타인에게 나를 드러내 보이는 공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나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오프라인 공간과 달리 SNS 속에서는 관계를 맺고 끊는 일에 있어서 훨씬 자유롭기 때문이다. 우선 마음대로 친구를 추가하고 삭제하는 게 가능하다. 계정을 공개 여부도 조절할 수 있다. 일부 지인들에게만 공개하는 것도 가능하고, 아예 비공개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SNS 상에서는 많은 관계들이 ‘익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분산적이고 파편화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실제 관계보다 SNS 속의 관계가 더 편하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N번방 사건이라던가, 민식이법이라던가, 미투처럼 특정 이슈나 사안들과 관련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해시태그, 팔로우, 공유 기능 등을 활용하여 조직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이나 요구를 표출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느슨한 관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장점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개인의 일상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둘러싼 다양한 관계들로부터 피로를 겪는 현대인들은 그럴수록 오로지 휴식에만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찾는다. 소위 말하는 ‘케렌시아’를 찾는 셈이다. 케렌시아란 투우장에서 소가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홀로 숨을 고르는 자기만의 공간을 말한다. 그리고 이 느슨한 관계는 케렌시아의 실현을 도울 수가 있다.
앞서 말한 무선 이어폰의 경우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무선 이어폰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자유를 준다. 첫 번째는 핸드폰과 연결되지 않을 자유다. 비록 귀에서는 음악이 들릴지언정, 물리적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행동이 훨씬 자유롭다. 거기다가 음악을 켜고, 끄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 두 번째는 세상과 연결되지 않을 자유다. 최근 출시한 에어팟 프로는 ‘노이즈 캔슬링’이라는 특별한 기능을 탑재했다. 이 기능을 사용하면 마치 귀마개를 한 것처럼 주변의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음악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용자는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할 수 있다.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일종의 케렌시아를 실현하는 셈이다.
2016년 처음으로 발의된 ‘퇴근 후 카톡 금지법’은 느슨한 관계의 이상을 가장 잘 보여준다. ‘사람인’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중 59.3%가 퇴근 후 업무를 지시받은 경험이 있으며, 10명 중 8명이 해당 법안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카톡 금지법에 따르면 업무 시간에는 최선을 다해 회사의 업무에 임하겠지만, 퇴근 후에는 어느 누구도 나의 개인적인 일상을 침범할 수 없다. 퇴근 후의 시간은 온전히 나의 시간이고, 나의 케렌시아다. 사람들이 관계에 피로를 느낀다고 해서 관계를 기피하거나 파괴하려는 게 아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사회적인 동물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 말이다. 대신 휴식을 통해 피로를 풀고, 다시 힘을 내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공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선 이어폰의 성공을 단순히 기술적인 성과나 사용의 편리함을 제공했다는 것만으로 보는 시각은 곤란하다. 어쩌면 무선 이어폰의 성공은 ‘지금은 잠시 혼자 있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다고? 그렇다면 신기한 것을 뛰어넘어서 그들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시킬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창의이고, 혁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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