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악마판사>
최근 드라마 <악마판사>가 인기를 끌고 있다. 시청률도 괜찮은 편이고, 시청자들 반응도 나쁘지 않다. 주인공인 강요한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장면에는 하나같이 사이다라는 둥, 현실에서도 이러한 판결을 보고 싶다는 반응들이 줄을 잇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류의 드라마가 최근 들어 계속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올해만 하더라도 <악마판사> 외에도 <모범택시>, <빈센조> 등이 나와 인기를 끌었다. 하나같이 법의 테두리를 넘어 자기만의 방식으로 악을 응징하는 주인공이 활약하는 내용의 드라마들이다. 이는 단순히 드라마의 트렌드가 변화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술은 현실을 모사하고 반영한다. 이야기에는 이야기를 보는 이와, 이야기를 쓰는 이의 시각이 담겨 있다. 말하자면 <악마판사> 같은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데에는 우리의 열망과 욕망이 한몫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악마판사>에 열광하는 이유는 현실의 사법적 판결이 대중이 원하는 정의의 범위를 충족하기에 모자라기 때문이다. 강력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진 사례들을 우린 이미 수없이 보았다. 오죽하면 ‘가해자의 인권을 더 신경 쓰는 나라’라는 오명이 붙었을 정도다. 실제로 2019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법부의 신뢰도는 OECD 국가를 통틀어 최하위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악마판사> 같은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도 십분 이해가 간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정의가 과연 진정으로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그렇기에 감히 묻고자 한다. 대관절 당신의 정의는 무엇인지.
정의란 무엇인가? 사전에 따르면 ‘정의’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개인 혹은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관점일 뿐, 현실의 영역에서 정의를 딱 잘라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쓰고, 오랫동안 강연을 해온 마이클 샌델 교수조차 ‘정의’에 대해 시원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한다(물론 나름의 해법은 제시한다).
다만 사법적 영역에서 정의의 의미는 비교적 명확하다. 첫째, 공정한 절차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이를 통해 진실을 드러낸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법정에서 증거 재판주의와 무죄 추청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모든 판단은 오로지 법정 안에서 제시된 증거와 진술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최종 판결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형사 피고인을 무죄로 추정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재판장에서 범인을 ‘범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피고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따라서 국가기관, 혹은 소추하는 쪽은 이러한 무죄 상태에서 출발하여 증거 등을 통해 피고인의 유죄 사실을 입증해야만 한다.
둘째, 밝혀진 진실을 바탕으로 불법, 혹은 범죄 행위를 저지른 이에게 정당한 처벌을 내린다. 단, 죄형 법정주의에 기초하여 해당 사실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이를 규정하는 법률이 미리 존재해야 한다. 또한 처벌을 내리는 기준이 되는 불법, 혹은 범죄 행위는 재판 과정에서 반드시 입증되어야 하며, 재판관은 입증된 범죄 사실에 대해서만 처벌할 수 있다.
셋째, 동종의 사건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는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가장 간과하고 있는 정의의 단면이기도 하다. 오늘날 모든 재판은 공개주의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이는 재판의 과정과 결과를 일반 대중에게 공개함으로써 외부의 영향력이 개입하는 걸 막고, 사법부의 신뢰도를 증진시키기 위해서지만 동시에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인식을 명확하게 함으로써 미래에 똑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억제하는 목적도 있다.
이외에도 우리는 형이 확정된 사람들이 가는 감옥을 '교도소', 혹은 ‘교정시설’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도 사법부가 추구하는 정의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교도소'라는 단어에서 '교도(矯導)'는 바로잡아 이끈다는 뜻이다. '교정시설'의 '교정(矯情)'도 마찬가지다. 범죄인을 정상인으로 교화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감옥은 범죄자를 처벌하는 곳인 동시에 재사회화 교육을 통해 그들이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곳인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악마판사>의 정의는 불안하고 위태롭다. 이 드라마의 재판은 피고인을 어떻게 처벌할 지에 관심이 있지, 진실을 드러내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물론 이는 드라마의 재미를 위해 계산된 스토리텔링에 의한 결과물이다. <악마판사>의 피고는 하나같이 변명의 여지 없이 범죄 사실이 시청자들에게 낱낱이 드러난 상황이다. 그런 마당에 굳이 숨겨진 진실을 찾아 스토리의 분량을 할애하는 건 낭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찝찝함은 남는다. 우선 실제 사건들은 드라마처럼 사건의 전모가 완벽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재판관은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품은 채로 재판에 임할 수밖에 없다. 처벌에만 오롯이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이다.
강요한이라는 인물의 신념도 문제다. 그는 재판을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이 게임에서는 입증하지 못하면 패배한다. 이는 바꿔 말해 원하는 결과(승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지어 증거를 조작해서라도 말이다(실제로 요한은 대기업 회장이 살인에 고의성이 있던 것처럼 몰아간 적이 있다). 이는 판사의 영역을 한참 넘어선 행위다. 판사는 모든 정보를 듣고 판단을 하는 사람이지, 재판에 개입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말대로 결과만 좋다면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가 그토록 혐오하는 힘 있는 자들의 논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재판의 가장 큰 목적은 범죄를 처벌하는 게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시민을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는 법조계의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가 괜히 삼심제를 채택하는 게 아니다. 이는 모두 진실을 밝히려는 간절한 몸부림이다. 그런 면에서 진실을 쫓는 대신 악인을 처벌하는 데에만 매달리는 강요한의 정의는 진정한 의미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볼 수 없다.
강요한의 정의가 가진 또다른 문제는 교화의 가능성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른 범죄자가 많은데 그들에게 교화가 가능할 것 같냐는 물음을 던질 수도 있다. 드라마 속에서도 강요한이 맡은 사건들의 범죄자들이 하나같이 갱생이 어려운 악질들 뿐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교화를 포기하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교화를 포기한다는 건 곧 인간이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는 것과 같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세상은 비로소 디스토피아가 된다.
<악마판사>의 배경은 디스토피아가 도래한 대한민국이다. 이곳은 지독한 역병과 그에 따른 경제 위기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부의 양극화는 심해졌고 거리에는 각종 범죄와 시위가 일상처럼 벌어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결국 꿈꾸기를 포기한다. 그런 와중에 마치 영웅처럼 '강요한'이라는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강요한의 정의는 희망없는 디스토피아에서나 가능할 법한 판타지다. 허나 그의 정의는 시민들에게 통쾌함은 줄지언정,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을 주지는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정의가 ‘분노’라는 바이러스를 퍼뜨린다는 것이다. 이 분노는 애석하게도 악인이나 가진 자들이 아니라 자신에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이에게로 향했다. 실제로 8화에서는 강요한의 정의에 선동된 이들이 ‘우리가 권력이다’를 외치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를 제지하는 경찰에게 이들은 무고한 시민을 총으로 위협했다며 마치 숭고한 순교자와 같은 행세를 했다. 강요한의 등장으로 악인에 대한 처벌은 확실해졌는데, 오히려 사회는 더욱 혼란스러워진 셈이다.
드라마 <비밀의 숲>에서 시목은 방송에 나와 이창준 검사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괴물입니다. 죄인을 단죄할 권리가 본인 손에 있다고 착각한 시대가 만든 괴물입니다.” 그리고 이는 ‘강요한’이라는 캐릭터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실수와 패착이 쌓여 만들어진, 우리 모두의 욕망과 열망이 투영된 괴물이다. 허나 그 괴물이 불완전한 시스템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지도, 무너진 세상에 희망을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희망은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민정호’ 같은 사람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를 쓰는 사람들 말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김가온’이라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 사기꾼에 의해 부모님을 잃은 가온은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오랫동안 방황을 했다. 그러다 민정호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올곧은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만약 가온이 만난 어른이 민정호가 아니라 강요한이었다면 그는 지금쯤 교도소 안에서 허송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글이 드라마 <악마판사>를 비판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내가 궁금했던 건 드라마 속의 정의가 실제 현실에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였다. 그리고 그 결론은 드라마 속의 정의가 현실의 정의를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진정한 정의는 악을 처단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진실을 추구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도록 만들어야 진짜 정의다. 혹자는 정의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나약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비밀의 숲>에서 시목은 이제껏 검찰이 저질렀던 잘못들에 대해 사과하며, 더욱 정직하고 정의로운 검찰이 될 것을 약속했다. 법집행관에게 가장 큰 무기는 헌법이다. 헌법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싸울 수 있다. 아마 <악마판사>의 민정호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있는 한 우리의 시스템은 아직 더 나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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