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마케터가 바라보는 요즘
바야흐로 콘텐츠 전성시대다. 오늘날의 콘텐츠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고 많은 돈을 벌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콘텐츠는 세상을 바꾼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BTS다. 그들은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한류를 선도하는 것을 넘어 UN에서 연설을 하는 등 청년과 미래 세대의 목소리를 전한다. 말하자면 그들의 음악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메신저인 셈이다.
한편 문화콘텐츠를 공부하고, 현재 콘텐츠 마케팅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이러한 풍경은 내게 퍽 흥미롭다. 내가 대학 신입생이었을 때만 하더라도 콘텐츠의 범위는 그렇게 넓지 않았다. 선배들 역시 대부분 방송국이나 영화사, 혹은 마케팅이나 광고 회사에 들어가 일을 했다. 아주 가끔 게임 회사를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처럼 주목받았다.
물론 그때도 1인 미디어의 인기는 대단했다. 다만 기존의 TV를 대체할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건 아니었다. SNS를 활용한 광고도 많지 않았다. 당연히 유튜버를 활용한 브랜디드 콘텐츠 광고도 많지 않았고, MCN 산업도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을 때였다.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하기 전이었으니 OTT라는 개념도 아직 국내에선 생소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때만 해도 광고 회사나 영화사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콘텐츠를 둘러싼 환경은 급격히 달려졌다. SNS가 콘텐츠 생태계의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따라 콘텐츠의 장르와 포맷도 조금씩 변화를 맞이했다. 주류 콘텐츠에서는 자주 다루지 않던 취미생활, 키덜트, 먹방, 요리, 인테리어 등 다양한 소재의 콘텐츠들이 친근감을 무기로 사랑받기 시작했다. 동영상의 편집은 빨라지고, 영상 길이 역시 스낵 컬처라 불릴 정도로 짧아졌다(지금은 숏폼이라 불리는 15초 내외의 콘텐츠들이 유통되고 있다).
한편 콘텐츠를 둘러싼 환경이 변화하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건 기존의 올드 미디어들이었다. 소위 말하는 방송국, 라디오들 말이다. 오죽하면 유명 유튜버의 하루 광고 수익이 MBC의 1일 광고 매출과 맞먹는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 물론 100% 팩트는 아니겠지만 그런 기사가 나올 정도로 방송국의 위상이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기다 2016년 넷플릭스의 한국 진출 이후 본격화된 OTT의 등장은 방송국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방송국의 부진을 마냥 콘텐츠의 변화라고 보기에는 사실 무리가 있다. 따지고 보면 예전과 비교했을 때 콘텐츠의 주제나 포맷, 제작 방식이 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사실 이건 유통의 혁명에 더 가깝다. 그리고 방송국이 예전만큼의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흔히 방송국을 콘텐츠의 공급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플랫폼 사업자에 더 가깝다. 방송국은 1개, 혹은 다수의 채널을 소유하고 그것을 여러 시간대로 쪼개어 해당 시간에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싶은 PD와 프로덕션들에게 편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어 사람들을 TV 앞으로 모여들게 만들면 이들을 광고주와 연결시켜 수익을 낸다. 말하자면 오늘날 유튜브와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점차 사람들이 SNS를 통해 콘텐츠를 소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TV 시청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방송국이 가진 플랫폼으로서의 영향력도 줄어들게 되었다. 줄어든 영향력은 곧 광고 수입의 감소를 의미한다. 이에 오늘날 방송국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동안 누려오던 플랫폼으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콘텐츠 공급자로서 자신을 본격적으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우선 과거엔 방송을 통해 화제가 된 무언가가 SNS를 통해 퍼졌다면, 오늘날엔 역으로 유튜브 등을 통해 인기를 끈 무언가가 방송을 통해 퍼져나가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가령 먹방 컨셉의 1인 미디어가 유행하자 방송국에서도 각종 먹방, 쿡방을 메인 소재로 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SNS에서 활동하는 펫 크리에이터가 자신의 반려동물과 함께 <동물농장>에 출연한 적도 있고, 유튜브에서 ‘저스트 댄스’ 게임을 활용한 콘텐츠가 유행하자 <런닝맨>에서 해당 게임을 가져와 방송에 활용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방송국에서 유튜브 등에 자체적으로 채널을 개설하여 이제껏 방영했던 콘텐츠들을 업로드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KBS에서는 유튜브에 공식 채널을 개설하여 ‘밥 친구 1박2일’이라는 컨셉으로 유튜브 영상을 틀어놓고 밥을 먹는 싱글족들을 겨냥하여 과거에 방영했던 <1박2일> 방송들을 재편집하여 업로드하고 있다.
혹은 모바일 환경이나 SNS 플랫폼에 최적화된 오리지널 콘텐츠를 기획하여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EBS의 ‘자이언트 펭TV’, JTBC의 ‘워크맨’ 등이다. 심지어 CJ는 자체 OTT 서비스인 ‘티빙’을 오픈하여 자사의 방송국에서 제작한 프로그램과 오리지널 콘텐츠를 서비스 가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지상파 3사 역시 SKT와 손을 잡고 ‘웨이브’라는 OTT 서비스를 통해 자신들의 콘텐츠를 공급하고 있다.
심지어 MBC의 박성제 사장은 지난 1일, 창사 60주년 기념행사에서 상업성을 철저히 배제한 광고 없는 MBC2 채널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는 물론 공영 방송국으로서 책무를 지키려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플랫폼 사업자가 아닌 콘텐츠 공급자로서의 역량과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이렇게 콘텐츠를 둘러싼 환경과 이에 대한 콘텐츠의 흐름도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나처럼 콘텐츠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은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때 사람들이 갖는 착각 중에 하나가 콘텐츠 시장을 제로섬 게임으로 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SNS 중심의 스낵 컬처 콘텐츠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TV나 라디오 같은 기존 올드 미디어들의 주류 콘텐츠들이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어폐가 있다. 그 증거가 바로 지난 10월 개봉한 영화 <듄>이다. 해당 작품은 1960대에 나온 SF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다. SF 장르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고전 중에 고전인 셈이다. 또한 소설의 압도적인 분량만큼이나 영화의 러닝타임도 155분으로 상당히 긴 편이다. 심지어 이제 겨우 시리즈의 첫 편인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마블 영화처럼 분위기가 가볍다거나 유머가 많은 것도 아니다. 기존의 논리대로라면 사실상 흥행이 어려운 작품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벌써 5억 달러에 가까운 수익을 냈다. 국내에서도 1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으며 관람객 평점도 8점 대로 나쁘지 않다. 심지어 영화가 개봉한지 벌써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박스오피스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이 영화가 단순히 일부 배우들의 티켓 파워에 기댄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의 방증이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도 앞서 말한 오해를 반박하는 좋은 증거다. 특히 지난 9월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며 침체기를 겪고 있던 넷플릭스에 성장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외에도 <킹덤>, <DP>, <마이네임> 등과 같이 원래라면 TV나 극장에서나 볼 법한 콘텐츠들도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사람들이 각자의 취향에 따라 세분화되어 짧은 콘텐츠를 즐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위 대작이라 불리는, 기존의 올드 미디어를 통해 유통되던 주류 콘텐츠에 대한 갈증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콘텐츠 시장은 어느 하나만 인기를 끄는 제로섬 게임이 아닌 수많은 취향과 기회의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논 제로섬 게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콘텐츠‘가’ 사랑받는 게 아니라 이런 콘텐츠‘도’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이 지금의 시장 상황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콘텐츠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그건 바로 콘텐츠를 만드는 목적과 이유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콘텐츠를 기획할지, 그것을 만드는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지. 누구에게 해당 콘텐츠를 어필할 것이며, 이를 어떻게 유통할지. 이상 네 가지 이유에 대답할 수 있어야 그럴듯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 수 있다.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 ‘꾸삐’의 사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레고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예전이었다면 다 큰 어른이 혼자서 레고 가지고 노는 모습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싶지만 오늘날엔 아니다. 그가 만드는 콘텐츠는 레고를 가지고 노는 어린이 뿐만 아니라 해당 장난감에 대해 향수와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키덜트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단순히 그가 레고를 가지고 놀고 리뷰하는 영상만 올릴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자신이 직접 레고를 조립하거나 제작하기도 하고, 레고를 활용하여 스톱모션 영상을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영상의 퀄리티도 꽤 높다. 최근엔 마블의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과 콜라보하여 스톱 모션을 만들기도 했다. 덕분에 이젠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꽤나 인기를 얻고 있으며 현재는 4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처음엔 일부 마니아들에게만 사랑 받았지만 그 인기를 바탕으로 점차 높은 퀄리티의 영상을 만들어 내며 보다 강력한 인플루언스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한편 반대편에는 <오징어 게임>의 사례가 있다. <오징어 게임>의 성공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 이 드라마가 성공한 이유는 주인공들이 플레이하는 게임에 있다. 보통 배틀 로얄 장르의 작품들은 살아남기 위한 주인공들의 치열한 전략과 눈치 싸움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보다 극적인 장면을 위해 종종 작품 속에서 진행되는 게임의 규칙을 꼬아놓기 마련인데 <오징어 게임>은 그렇지 않다.
<오징어 게임>에서 진행되는 게임들은 모두 쉽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즐기는 골목놀이를 가져왔지만, 해당 게임을 처음 접한 외국인도 5분만 보면 게임의 규칙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이는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는 콘텐츠로서 강력한 장점이다. 술래가 뒤를 돌아봤을 때 움직이면 탈락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과자에 그려진 모양을 정확히 떼어내야 하는 ‘달고나 게임’, 상대방과 힘을 겨루어 줄을 당기면 이기는 ‘줄다리기’ 등등. 주인공의 대사로도 언급될만큼 이 드라마 속 게임들의 규칙은 ‘단순’하다.
그리고 이렇게 쉬운 게임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드라마 속 상황에 대해 빠른 이해와 몰입을 유발한다. 물론 그중에는 구슬치기나 오징어게임 같이 외국인들이 이해하기엔 다소 어려운 게임도 있긴 하지만 별로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해당 게임이 진행되는 스테이지에서는 누가 게임에서 승리하냐 보다는 인물들 간의 관계와 감정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구슬치기에서는 새벽과 지영의 우정이, 오징어 게임에서는 서로를 죽일 수밖에 없게 된 기훈과 상우의 비극적인 운명이 더 중요한 주제였다.
한편 쉬운 게임은 SNS에서 2차로 전파되기에 너무나 좋은 소재다. 실제로 드라마를 본 외국인 시청자들이 <오징어 게임> 속 등장했던 게임들을 직접 해보는 각종 패러디 영상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SNS에서 큰 인기를 끌며 <오징어 게임>의 장기 흥행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 오늘날 콘텐츠 시장은 많은 가능성과 기회가 혼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건 결국 앞서 말한 콘텐츠를 만드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다. 무엇을 만들고, 그것을 왜 만드는지. 누구를 위해 만들고,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이에 대한 디테일한 대답들만이 가능성만 들어찬 모호한 콘텐츠 세계에 길을 만들고 우리를 문으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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