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라는 시스템을 향한 근본적인 고민
지난 4일,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막을 올렸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그리고 시작된 이후로도 여러모로 말이 많은 대회라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컸지만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벌써 메달을 3개가 수확한 선수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일각에서는 최저 시청률이라느니, 관심이 없다느니 벌써부터 흥행에 실패했다는 관측이 나오지만 또 막상 주위를 둘러보면 마냥 그런 것 같진 않다. 그래도 나름 전 세계인의 축제라는 걸까.
하지만 아쉽게도 ‘나’라는 사람은 그러한 올림픽 열기에 한 발짝 빗겨 나 있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땄던 벤쿠버 올림픽까지는 나름 경기도 열심히 챙겨보고 응원도 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최근으로 올수록 올림픽에 관심이 가질 않는다. 사실 평창 동계 올림픽 때도 그랬다. 요즘은 경기 영상은커녕 뉴스도 챙겨 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유를 생각해 봤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고,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냥 올림픽이 불편하다. 더 나아가 ‘올림픽’이 불합리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작년의 도쿄, 올해 베이징 올림픽을 겪으며 확신으로 굳혀졌다.
단순히 특정 국가의 횡포나 텃세라던가, 혹은 오심 때문만은 아니다. 메달을 따기 위해 지난 4년간 선수들이 쏟은 피와 땀을 폄훼하려는 마음은 더더욱 없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올림픽’이라는 시스템이 가진 보다 근본적인 문제다.
작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서 IOC는 무려 100년 만에 올림픽의 슬로건을 변경했다. 기존의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에서 ‘다 함께’를 추가한 것이다. 갈수록 경쟁이 과열되는 측면을 경계하고 올림픽이 평화와 화합의 장이라는 사실을 재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늘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원수지간인 사람들도 국가대표 경기 앞에선 한데 뭉쳐 같은 팀을 응원한다. 이렇듯 스포츠에겐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있다. 말하자면 스포츠에는 우리 안의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올림픽이 화합의 장이라고 하지만 경쟁을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스포츠의 특성상 평화와 화합이라는 올림픽의 숭고한 가치는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물론 선수들에게는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노력했던 숱한 시간들이 있기 때문에 서로가 뭉클하겠지만, 정작 올림픽을 시청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국 선수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을 누르고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두는지에 대해 더 관심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종종 메달을 차지하지 못한 선수를 향한 비난, 혹은 대신 메달을 딴 다른 나라 선수를 향한 비난으로 종종 번지기도 한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에서 터진 일련의 편파 판정 사건에서 전 국민이 분노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가 해당 경기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지만 피해를 당한 선수와 동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질감은 우리가 서로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데에서 나온다.
이외에도 이번 올림픽의 스키 프리스타일 종목에서는 미국 출신의 중국 귀화 선수인 구아이링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며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에서는 새로운 메달리스트의 탄생을 기뻐하며 그녀의 얼굴을 500대의 드론으로 장식하는 공연을 펼치는 등 애국주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미국의 일부 언론과 시민들은 그녀를 배신자로 몰아붙이며 비난을 가하고 있다. 이에 구아이링 선수는 스포츠는 분열이 아닌 단결을 위한 것이라며 호소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나쁘게만 볼 건 아니다. 20세기 수많은 국가들의 독립과 자유도 사실은 이러한 민족주의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동시에 위험한 개념이기도 하다.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등도 출발은 민족주의였다. 영화 <호텔 르완다>의 배경이 되었던 르완다 학살 사건도, 보스니아 내전 당시 벌어진 인종 청소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인종차별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민족주의의 영향이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경쟁과 화합이라는 대조적인 감정이 함께 존재하는 올림픽 현장에서는 이러한 위험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물론 대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경기를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안다. 하지만 최소한 노력은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모두가 납득할 만한 공정하고 합리적인 판정에 의해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
허나 IOC와 국제 스포츠 기구의 대처는 늘 아쉽다. 쇼트트랙과 스키점프 등에서 벌어진 일련의 판정 시비뿐만이 아니다. 최근엔 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도핑 검사에 적발되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IOC는 늑장 대응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IOC는 나은 편이다. CAS는 그녀의 출전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경기를 시청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들의 새로운 슬로건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다 함께’가 빛바래 보이는 이유다.
올림픽은 매우 값비싼 행사다. 올림픽 유치부터 개최 준비에 필요한 각종 경기장, 사회 인프라 건설, 대외 홍보와 대회 운영까지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올림픽 특수’라고 해서 관광수입, 티켓 판매료, 중계권료, 기업의 후원금 등 적지 않은 수익이 나오긴 하지만 개최국은 이를 IOC와 나눠가져야 한다(그에 반해 IOC가 대회 준비를 위해 내는 돈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평창 올림픽 당시 대회 준비에만 약 13조 8,000억의 비용이 발생했지만 IOC가 낸 후원금은 4,400억에 불과하다. IOC의 배만 불려준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올림픽 개최를 통해 특정 국가, 혹은 도시가 경제적 이윤을 남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오죽하면 ‘올림픽 저주’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말이다.
실제로 2010년의 벤쿠버 올림픽, 2016년 리우 올림픽 땐 한화로 6조가 넘는 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역시 마찬가지다. 대회 조직위에 따르면 올림픽을 통해 약 14조 원의 수입을 기록했고, 13.8조를 올림픽 준비 비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창 올림픽은 2천억의 흑자를 기록한, 흥행에 성공한 올림픽이다. 하지만 수입으로 기록된 14조 중 12조 가량은 국비와 지방비에서 나왔다. 쉽게 말해 세금으로 수입을 메꾼 셈이다. 사실상 제대로 된 의미의 수입은 2조 원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사실 그마저도 절반은 국내 기업의 후원금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올림픽이 끝난 후가 사실 더 문제다. 평창 올림픽이 끝난 후 일부 경기장을 제외한 많은 대회 시설들이 철거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당연히 막대한 비용이 함께 발생했다. 가령 작년 6월에 철거가 결정된 가리왕산 알파인 스키 경기장의 철거 및 산림 복구 비용으로는 1,000억 원이 넘게 발생할 것이라고 한다(산림청 추산). 참고로 이 경기장 건설하는 데에만 정부는 2,000억 원을 넘게 사용했다.
또한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이 제출한 자료를 살펴보면 강릉 하키센터, 스피드 스케이팅장 등 아직 남아있는 평창 올림픽 시설들이 재활용에 실패하여 지난 3년간 135억 원의 누적 적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80%의 수익률이다. 여기에 앞으로 들어가게 될 비용까지 생각하면 평창 올림픽은 결코 흑자 올림픽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올림픽의 적자 경향은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더욱 심화되었다. 실제로 작년 도코 올림픽 당시, 대회 조직위는 코로나19로 인해 해외 관광객 유치 실패와 무관중 진행 등으로 인해 올림픽 특수를 전혀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올림픽이 끝난 후에 코로나19 환자들이 폭증하면서 그들을 치료하는 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개최가 1년 미뤄지면서 발생한 추가 비용까지 감안하면, 가히 천문학적이라 불릴 정도의 적자가 발생한 셈이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 역시 아마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갈 것으로 보인다. 무관중 대회를 피하긴 했지만 코로나19가 여전히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올림픽 특수를 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기다가 이번 대회를 100% 인공 눈으로 진행하면서 무려 200만㎥의 물(무려 1억 명이 마실 수 있는 양이다)을 사용했다고 하니 이에 따른 환경 파괴, 경제적 비용 부담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혹자는 올림픽이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국가 브랜드 이미지 향상을 가지고 온다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올림픽을 개최하는 거의 모든 국가가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오른 국가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들이 얻는 브랜드 이미지 향상이 얼마나 될까 싶다(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가 올림픽을 한 번 더 연다고 해서 그 나라의 위상이 달라질까?). 88년 당시의 서울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올림픽 개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미지 상승효과는 그리 크지 않은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많은 국가들이 올림픽 개최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 실제로 2022년 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 당시 스페인 마드리드, 독일의 뮌헨 등 올림픽 유치를 희망했던 도시들 중 대부분이 입후보를 포기하거나 철회했으며 결국 중국 베이징과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2파전이 되고 말았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은 올림픽’인 셈이다(덕분에 다음 2026년 동계 올림픽은 비용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2개 도시에서 공동 주최하는 형태를 띤다. 물론 두 도시 모두 나라가 같기 때문에 비용 절감 효과는 그리 크지 않겠지만 말이다).
한편 올림픽 개최에 들어가는 막대한 경제적 부담은 지구촌 축제를 그들만의 축제로 만드는 장벽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계와 동계를 통틀어 100년이 넘는 올림픽 역사 가운데 비서구권 국가에서 올림픽을 개최한 사례는 한국, 일본, 중국, 브라질, 멕시코뿐이다. 그 외 나머지 대회는 모두 미국이나 유럽권 국가에서 치러쳤다는 뜻이다.
이는 매우 심각한 불균형이다. 물론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는 도시의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아무래도 선진국이 더 유리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오늘날처럼 올림픽 고비용화가 심해진다면 일부 선진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로서는 아무리 정치, 사회, 경제적 안정을 이루어내더라도 올림픽 개최에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덕분에 올림픽은 점차 일부 선진국들의 값비싼 선전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 올림픽이 모두를 위한 축제가 아닌 일부 선진국들의 지위를 강화시키는 하나의 차별적 장치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 나머지 국가들은 사실상 들러리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계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육상에서 강세를 보이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단 한 번도 올림픽을 개최는커녕, 도전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이 과연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까? 정말 이것이 전 세계인의 축제라고 불릴 자격은 있는 걸까?
현재 IOC는 올림픽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올림픽에서 정치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번에 펼쳐진 일련의 보이콧 사태만 놓고 봐도, 올림픽이 특정 국가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창구이자 방법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만큼 전 세계의 주목을 쉽게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또한 올림픽이 개최되면 각국에서는 의례적으로 외교사절단을 파견한다. 이렇게 세계 각국의 정상, 혹은 외교적 지도자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에서 정치적인 회담이나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납득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당장에 우리나라 정부만 보더라도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실현시켰고, 나아가 북미협상을 이끌어내지 않았었나. 이렇듯 정치에서 올림픽이 가지는 파급력이란 꽤 무시무시하다.
그렇다면 세계 각국은 올림픽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할까?
우선 올림픽은 특정 국가의 이미지를 정치적으로 미화하는 데 있어 사용되기 좋은 도구다. 일례로 독일의 나치당은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을 자신들의 체제를 선전하고 미화하는 데 철저히 이용하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역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던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의 속셈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번 베이징 동계 올림픽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은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코로나19, 중국 내 인권 탄압 문제, 홍콩 보안법 제정 등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효과를 기대했다. 실제로 중국은 성화의 마지막 봉송 주자로 신장 위구르 출신 인물을 선택했다. 이는 자신들의 인권 탄압 사실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중국이 서방 국가들에게 보내는 응수였다.
둘째로 올림픽은 국민들을 하나로 모으고, 내부 결속을 다지기 좋은 구실이 된다. 부정하고 싶지만 앞서 말했듯 스포츠는 우리 안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과 같은 거대한 무대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국민이라는 동질성 때문이라도 선수들을 응원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이 정치권력에게는 이용하기 좋은 도구라는 것이다.
일례로 88년의 서울 올림픽은 어려운 현실을 딛고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서울과 대한민국의 위상을 알린다는 목적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올림픽을 통해 독재 정권을 향한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전두환 정부는 소위 ‘3S’라 불리는 정책을 통해 스포츠를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고 권력의 장기적인 안정을 이끌어내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했었기에 이러한 시각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또한 1986년 발표된 4.13 호헌 조치 내용을 살펴보면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직선제 개헌을 올림픽 이후로 미루겠다는 내용이 있는데 당시 정부가 올림픽을 얼마나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올림픽 보이콧이 있다. 실제로 올림픽 역사를 보면 세계 각국이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기 위해 올림픽 보이콧을 활용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에는 뉴질랜드의 참가와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아프리카 26개국이 올림픽을 보이콧했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당시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하며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 국가들이 올림픽을 보이콧했고, 1984년 LA 올림픽 때는 앞선 보이콧의 보복 조치로써 공산권 국가들이 대회 참가를 거부했었다.
이러한 사례는 최근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14년 소치 올림픽 당시에는 러시아의 인권 탄압과 우크리아나 문제에 항의하며 외교적 보이콧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번 베이징 동계 올림픽 역시 미국, 영국, 호주 등을 포함해 10개가 넘는 나라가 코로나19 책임 회피, 인권 탄압 문제 등을 이유로 중국에 항의하며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해 큰 파장이 있었다.
이렇듯 정치에서 올림픽을 이용하는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체제를 미화하거나 권력을 정당화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올림픽을 통해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도 나쁘게 볼만한 일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심화되면 결정적으로 선수들에게 피해가 간다.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 누군가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 되는 일은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IOC의 대처는 매우 실망스럽다.
평창 올림픽 당시 독도 표기 문제를 두고 정치를 스포츠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은유적으로 압박을 가했던 IOC는 3년 뒤 도쿄 올림픽에서는 일본의 독도와 쿠릴 열도 표기를 두고는 문제없다는 스탠스를 취했다. 또한 당시 이순신 장군의 말씀을 활용한 대한민국 선수단의 응원 문구에 대해서는 철거를 요구하면서, 욱일기 반입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014년과 올해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두고서도 IOC는 강 건너 불구경 중이다. 이번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는 오히려 중국을 두둔하며 반발을 사고 있다. 심지어 대회 중 특정 선수의 도핑 적발 문제를 두고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우리는 IOC가 정말로 정말 올림픽의 가치를, 선수들의 노력을 존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은 선수가 아닌 힘의 논리를, 스포츠 정신이 아닌 더 많은 돈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진짜 현실이다.
스포츠워싱이라는 말이 있다. 특정 기업이나 국가 등이 스포츠 구단을 운영하거나 스포츠 경기를 통해 자신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어내는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스포츠워싱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벤트의 흥행과 성적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IOC가 개최국이나 강대국에 유리한 판정 시비에 유독 관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선수들이 늘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포츠 경기를 보며 이면에 숨은 불편한 진실과 별개로 감동하고 열광한다. 바로 이것이 스포츠 정신의 힘이다. 하지만 IOC와 몇몇 특정 집단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선수들의 철저히 헌신을 이용한다. 올림픽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선수들의 노력을 자신들을 위한 들러리로 만드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림픽의 가치는, 존재 이유는 이미 사실상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이것이 내가 올림픽을 불편해 하는 진짜 이유다. 인류의 발전과 평화를 위한 올림픽이 아닌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올림픽. 특정 국가만이 독점하는 올림픽. 누군가의 속셈의 의해 좌우되는 올림픽. 고작 스포츠워싱 따위에 이용되기에 스포츠정신은 너무나 숭고하다. 송고해서 더 안타깝고 애처롭다.
과연 IOC는 바뀔 수 있을까. 올림픽은 가치를 회복하고 모두를 위한 축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다시 기꺼이 올림픽을 시청할 수 있을까. 글쎄, 일단 적어도 2025년까지는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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