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현실을 모방한다.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져 온 예술의 오랜 속성이다. 이 말은 예술이 기본적으로 현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술에 있어 무슨 의미로 작용할 수 있을까. 이를 통해 예술은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단서가 될만한 꽤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했다(물론 그가 이 물음을 염두에 두진 않았을 것이다). 벤야민이 활동하던 20세기는 기술의 발달로 영화, 사진 등 소위 말하는 대중문화가 한창 태동하던 시기였다. 전통의 회화, 음악, 문학 등과는 전혀 다른 이 새로운 예술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은 날로 증가했고, 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나타났다(ex-프랑크푸르트학파).
하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기존 예술 장르의 권위가 여전히 강하던 때라 새롭게 등장한 대중문화는 생각보다 환영을 받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프랑크푸르트학파 역시 대중문화에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중문화가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 무비판적인 수용을 조장한다는 점, 개성의 획일화 등을 이유로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대중문화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발터 벤야민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반대로 대중문화의 이점들을 주장했는데 오늘은 그중에서도 ‘예술의 정치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술의 정치화란 간단히 말해서 예술이 현실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낸다는 뜻이다. 이전까지의 예술은 (벤야민에 따르면)현실과 분리된 성격이 강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예술은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먹고살기도 바쁜 와중에 일반 대중이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예술은 경제적으로 형편이 넉넉한 일부 특권층을 중심으로만 소비되었다. 예술가들 역시 일반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기보단 귀족들의 후원과 소비를 통해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가들에겐 그들의 가장 큰 고객인 특권층의 미움을 사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당연히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이를 두고 벤야민은 현실에 대한 예술의 직무유기라고 표현하였다). 대신 오히려 이러한 점을 파고들어 오히려 특권층이 예술을 이용하였다.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을 일종의 선전 도구로 악용한 것이다.
하지만 대중문화는 다르다. 일부 특권층이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생산과 판매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훨씬 자유롭다. 그렇기에 예술가들도 더 이상 일반 특권층을 상대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자연스레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도 자유로워졌다. 다시 말해 이전까지의 예술이 현실의 삶과 분리된 외로운 예술이었다면, 새롭게 등장한 대중문화는 실제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재창조되는 일종의 대항문화인 것이다.
(출처-로스트아크)
제목 : 로스트아크LOSTARK 장르 : MMORPG 개발사 : 스마일게이트 RPG 출시 날짜 : 2019년 12월 4일
오늘은 스마일게이트의 ‘로스트아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스토리다. 물론 스토리가 게임의 필수 요소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토리는 그 게임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적어도 아직까지는 로스트아크는 내게 꽤 만족스러운 게임이다.
로스트아크의 세계관에는 다양한 대륙과 각각에 얽힌 스토리가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 중 하나가 바로 ‘로웬’이었다. 로웬의 이야기는 실마엘 혈석이라 불리는 귀중한 광물을 얻기 위해 몰려온 이민자들과 원주민 타이예르의 대립을 토대로 두고 있다.
게임이 시작되면, 플레이어는 로웬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캠프에 쳐들어와 이민자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타이예르들을 목도한다. 하지만 이후 우연히 타이예르의 한 부족 마을에 들리게 된 플레이어는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되는데, 이민자들이 실마엘을 얻기 위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부렸다는 것이었다. 이에 분노한 타이예르들은 이민자들을 향해 복수를 맹세했고, 그 비극의 고리들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다.
사실 유저들 사이에서 로웬의 이야기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하지만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플레이어가 타이예르를 이해하게 되는 방식이었다.
처음 플레이어는 타이예르에게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오자마자 그들이 벌인 학살극을 목도했기 때문이다(심지어 그들은 플레이어에게 처음 도움을 준 사람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타이예르의 여정에 함께하면서 그들을 향한 오해를 씻고, 그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이해하고 공감한다.
어떻게 보면 이 스토리의 주인공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타이예르라고 해도 무방하다. 플레이어는 오히려 타이예르의 삶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화자에 가깝다. 하지만 동시에 플레이어는 타이예르와 함께하며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함께 싸워나감으로써 또 한 명의 타이예르로 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에 플레이어가 뮨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말이었다.
한편 이야기의 외적으로도 로웬은 나를 흥미롭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앞서 언급한 ‘예술의 정치화’와도 관련된 부분이다. 현실의 이야기를 꺼낼 때가 온 것이다. 아마도 짐작했겠지만 로웬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미국 인디언들의 이야기가 떠오르게 된다. 실제로 로스트아크 개발진도 서부 개척 시절 인디언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로웬의 이야기는 단순히 지나가버린 비극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현대에도 인디언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에게도 주목해야 한다.
(출처-로스트아크)
3년 전쯤 연인과 광주의 펭귄 마을에 방문한 적이 있다. 아담한 골목 사이사이로 귀여운 벽화와 레트로한 디자인의 가게들이 눈길을 끄는 곳이었다. 물론 그때는 그곳이 왜 펭귄 마을로 불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벽에 펭귄 그림이 많아 그렇게 불리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실제 사연은 달랐다. 원래 이곳은 가난한 달동네였다. 특히 노인분들이 많이 살았는데 허리와 무릎 등이 좋지 않아 절뚝거리며 걷던 주민들의 모습이 마치 펭귄을 닮았다 하여 펭귄 마을로 불리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이 마을만의 소소한 매력이 입소문을 탔고 현재는 광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그렇다면 살던 곳이 인기 관광지가 되었으니 주민들의 삶도 조금이나마 나아졌을까. 슬프게도 오히려 반대였다. 도심 재생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예술가들을 유치하면서 위해 기존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모두 내몰린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 마을 방문했을 때도 주민분들을 거의 뵙지 못하였다. 펭귄 마을에 펭귄이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이후 몇 년이 지나 나는 이 기억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되었다. 작년부터 1-2시간 정도 밤 산책을 하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과 전날까진 해도 멀쩡하게 장사를 하던 식당이 하룻밤 사이에 건물이 통째로 사라진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하나둘씩 거리에 빈 건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나는 그제야 빈 건물들을 들여다보았다. 창문에는 빨간색 페인트로 엑스자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출입구에는 OO구 재개발조합에서 써 붙인 종이들이 펄럭거렸다. 그랬다. 지금 이곳은 재개발 중이었던 것이다.
(출처-로스트아크)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16세기 이후 중세 유럽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새롭게 중산층(젠트리) 계급의 등장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오늘에는 도시 내 낙후 지역이 자본과 외부인의 유입으로 활성화되면서 임대료 상승 등이 일어나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광주의 펭귄 마을, 인사동, 신사동 가로수길, 이태원 경리단길 등이 대표적인 젠트리피케이션 사례다.
그렇다면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적인 경제 이론에 따르면 생산은 크게 노동력, 자본, 토지의 3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젠트리피케이션 상황에 대입하면 토지는 건물주, 자본은 건물의 임차인, 노동력은 일반 근로자, 혹은 주민들로 치환할 수 있다. 이때 도시가 활성화되면서 해당 지역에는 외부로부터 많은 부가 유입되는데 이 부가 제대로 분배되지 않으면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다. 쉽게 말해 지주(地主)/건물주가 부를 독점하는 행위가 젠트리피케이션의 진정한 원인인 것이다. 물론 그 자체가 마냥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토지 역시 생산의 한 축이기 때문에 지주도 제 몫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 다만 정도를 넘어가면 그건 문제가 된다.
한편 이렇게 발생한 젠트리피케이션을 그저 임차인의 비극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사실 젠트리피케이션은 지역 공동체 모두의 문제다. 여기엔 당연히 지주/건물주도 포함되어 있다. 펭귄 마을, 경리단길, 인사동 등이 인기를 끌었던 건 그 지역만의 독특한 분위기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친 임대료의 상승으로 원주민들이 떠난다면 그 지역만의 독특한 매력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대신 그 빈자리는 뻔한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들어와 채운다. 그렇게 되면 도시는 어느 순간 개성을 잃고,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결국 다시 예전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태원의 경리단길이다.
그렇다면 젠트리피케이션을 해결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다. 정부는 시장의 중재자로서 독점된 부를 견제하고, 이것이 노동과 자본의 주체에게도 돌아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도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시장에 개입하여 젠트리피케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재개발’이다. 이를 통해 과열된 임대료 상승을 해소하고, 도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원주민들이 밀려나게 된다는 점에서 이는 반쪽짜리 해결책에 불과하다. 두 번째 방법은 제도적 차원에서 정부가 개입하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국회에서는 임대차 보호법 개정안, 상가건물임대차 보호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법안 통과까지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몇 년씩 걸린다는 점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이로 인해 시장의 상황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마지막 방법은 정부의 중재 아래 이해관계자들이 모여 협의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문제 인식을 공유하고, 이익을 공유함으로써 젠트리피케이션을 해결한다. 어떻게 보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입장과 목적을 지닌 이들을 상대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협의를 이끌어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여러 지자체에서 상생 협약이라는 것을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낸 사례는 거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안타깝게도 젠트리피케이션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이 비극은 임차인과 건물주 간에, 혹은 남아 있고자 하는 사람들과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들 간에 갈등을 더욱더 심화시킨다. 그리고 결국엔 도시와 공동체의 미래를 앗아간다.
(출처-로스트아크)
그런 의미에서 로웬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앞서 로웬을 설명할 때 이민자들과 타이예르의 대립을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세력도 존재한다. ‘세이크리아’라고 불리는 사제 집단이다. 이들은 로웬에서 작은 정부 역할을 수행한다. 무법자들로 가득한 로웬에서 각 세력의 균형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민자들을 보호하고, 타이예르와의 분쟁에 대해 해결책을 모색한다. 실마엘의 위험성을 알리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도 고민한다.
하지만 게임이 진행되면서 플레이어는 이토록 로웬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던 세이크리아가 사실 누구보다 가혹하게 타이예르를 착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타이예르의 비극과 이민자들의 절실함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동조, 혹은 방임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착실하게 챙겨왔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남아 있기를 희망하는 사람들과 들어오고 싶은 사람들의 절실함과 갈등을 이용하여 높은 임대료를 챙기던 건물주/지주, 혹은 건물주/지주와 임차인 간의 갈등을 무기력하게 지켜만 보던 정부의 모습과 닮아 있다.
물론 희망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세이크리아 내에서도 자신들의 행동에 문제의식을 가진 사제가 있었다. 서로 대립만 지속하던 이민자들과 타이예르도 세이크리아의 배신을 깨닫고는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어 그들에게 대항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사제는 끝내 자신의 의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이민자들도 재정비를 이유로 전장을 이탈해 버렸고, 오직 타이예르만이 세이크리아에 맞서 싸웠다. 긴 전투가 끝난 후 타이예르도, 세이크리아도 떠난 그 자리를 채운 건 이민자들이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서도 각자의 계산에 따라 둘로 갈려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출처-로스트아크)
예술은 현실을 모방한다. 하지만 동시에 허구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예술을 함께 구성한다. 한편 리얼리티와 판타지의 동거는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만든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바램을 예술을 통해서라도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 혹은 예술처럼 현실의 삶이 보다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그렇기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나 역시도 로웬에서 그런 희망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게임 속에서라도 현대의 인디언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희망을 말이다.
하지만 그 바램은 꺾였고 로웬은 텅 빈 도시가 되었다. 세이크리아도, 타이예르도 떠났다. 이민자들만 그곳에 남았다. 생기와 희망 대신에 욕망과 갈등만이 남아 그 도시를 부유한다(그래서 이곳을 PVP 지역으로 설정한 걸까). 3년 전쯤 다녀왔던 펭귄 마을이 다시 떠오른다. 진짜 펭귄(주민분들)은 어디 가고, 펭귄 그림만이 남아 쓸쓸하게 여행자들을 반겨주던 곳. 그렇게 나는 게임 속에서도 또 하나의 펭귄 마을을 마주했다. 아마 이곳에 방문할 때마다 게임과 우리 시대의 비극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