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망한 관계
몇 해 전의 일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모처럼 본가에 내려와 단잠에 취해 있었다. 그때 귓가에 희미한 울음소리가 닿았다. 그 소리는 잠들어 있던 나의 의식을 멱살 잡고 잠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어렵사리 눈을 떴다. 우리 집 고양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고프니 밥을 달라고 나를 깨우고 있었다.
본가에 내려올 때마다 있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기상은 늘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별 수 없다.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날 때까지 곁에서 칭얼거릴 테니깐. 결국 밖으로 나와 녀석의 밥그릇에 사료를 채웠다. 그런데 이게 웬걸. 평소 같으면 바로 달려들어서 밥을 먹었을 녀석이 가만히 앉아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혹시나 싶어 물을 떠다 줘도, 화장실을 치워줘도 녀석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심술이 났다. 자는 사람 깨워놓고 이렇게 무시하기 있어? 나는 녀석을 들어 밥그릇 근처로 데려다주었다.
그때 갑자기 녀석이 내 팔을 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던지 살이 움푹 파이다 못해 피까지 맺혔다. 예상치 못한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심술은 짜증과 화로 바뀌었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자리에 누웠다. 문밖에서 녀석이 야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다음 날, 가족 모두가 모인 거실에서도 우리는 데면데면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녀석은 은근슬쩍 내 곁에 다가와 칭얼거렸고 나는 그 모습이 얄미웠다. 부끄럽지만 우리의 관계는 한동안 소원했다. 허나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그때의 난 이제 막 오랜 연애에 실패한 참이었으니까.
내게 사랑을 가르쳐줘서 고마워. 그녀의 마지막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편지를 읽는 동안 그간 함께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웃기게도 불과 전날까지 나는 그녀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애정을 담아 편지를 썼었다. 그랬다. 그날은 우리의 기념일이었다. 그런 날에 그녀는 내게 이별을 선물했다. 갑작스런 이별 앞에서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눈물로써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내겐 그 의지를 꺾을 명분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우린 남이 되어야 했다.
그녀와 재회한 건 이별한 지 2주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오래전 함께 보러 가기로 약속했던 전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이별을 선언한 그녀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질하고 뒤끝 있는 남자로 기억되는 게 더 싫었다. 물론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나 혼자만의 기대일 뿐이었다.
4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길들여지기에 매우 충분한 시간이다.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연애 시절의 버릇은 끈질기에 살아남아 우리 사이를 맴돌았다. 전시를 보고 나와 잠깐 들린 카페에서 그녀는 내 손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그러면서 기대는 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건 그냥 오래된 습관일 뿐이니까. 그 말에 나는 손을 들어 테이블 아래에 두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출발 전에 가졌던 약간의 기대는 어디 가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그녀와 그 순간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최은영 작가의 단편소설 <한지와 영주>의 이별도 그랬다. 주인공 영주는 프랑스를 여행하다 우연히 들린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머물게 된다. 그녀의 가족, 지인, 심지어 남자친구마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결심은 굳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케냐에서 온 한지를 만났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한국의 사람들과 달리 채근하지 않고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한지에게 영주는 편안함을 느꼈고, 한지 역시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두 사람의 관계는 깊어졌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마치 거짓말처럼 한지는 영주의 곁을 떠나버렸다. 말을 걸지도, 곁에 다가오지도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마냥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존재를 무시했다. 그런 한지의 모습에 영주는 당황하였지만 한지마저 자신의 남자친구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가 돌변한 이유를 찾아 헤맸다. 도대체 어쩌다가 우리 관계가 이렇게 망해버린 걸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듯, 모든 관계가 항상 해피엔딩을 맞이하진 않는다. 흥한 관계가 있다면, 망한 관계도 있다. 나와 고양이가 그랬듯, 나와 그녀가 그랬듯, 한지와 영주가 그랬듯.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성공에 대한 기억보다 실패에 대한 기억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어떤 관계가 망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이유를 되묻는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내가 연락을 너무 안 했던 걸까.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등등. 왜냐하면 우리에겐 이해의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수록 우리는 더욱더 이유에 매달린다. 미신과 징크스가 아직까지 존재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비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닥친 불가해한 사건들을 이해의 영역에 가져다 놓으려는 것이다.
망한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 심리학자는 이별(망한 관계)의 고통을 교통사고의 고통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 고통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관계가 망한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영주는 한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혹시라도 자신이 그에게 잘못한 일이 없는지 복기했다. 그럼에도 그 이유를 찾지 못하자 제발 나에게 이러는 이유를 알려달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하지막 애석하게도 대다수의 망한 관계는 얄궂게도 그 이유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침묵은 관계의 당사자들을 늘 아프게 만들었다. 처음엔 내가 잘못한 것들을 생각하고, 그 다음엔 상대에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며 상대를 이해하려 든다. 그러다 어느 날엔 모든 책임을 상대에게 돌리며 힐난하다 그런 자신이 한심해진다. 이해는커녕 독한 굴레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결국 두 가지 뿐이다. 어떻게든 관계를 다시 되돌리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관계가 망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때까지 내버려 두거나.
“시간이 지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렇게 내버려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작은 기억 하나도 제대로 잊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 <한지와 영주> 中 -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 영주가 선택한 건 침묵이었다. 한지와 영주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지도, 멀어진 이유조차도 알지 못한 이별이었다. 결국 영주는 스스로를 방에 가두고 침묵하기를 택했다(어쩌면 그녀는 침묵을 통해서라도 한지를 이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침묵하는 그를, 침묵으로써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한편 내가 택한 방법은 그녀를 나에게서 영원히 추방시키는 것이었다. 통화, 문자, 메신저, 사진, 편지 등 지울 수 있는 건 모두 지웠다. 그녀와 연결될 수 있는 건 작은 빌미라도 모두 없앴다. 그녀를 이해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에게 물을 수도 없다면 스스로 납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주면 그만이었다. 물론 그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이미 해본 적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타겟은 내가 대학교 2학년일 때 만났던 꼰대 동아리 회장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할 수 있었다. 다만 좀 많이 잘라내야 했을 뿐. 그리고 그 잘라낸 조각들은 시간 앞에서 천천히 부스러져 흩어질 것이었다.
그 후로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관계를 맺었다. 흥한 관계도, 망한 관계도 있었다. 이쯤 되면 충분히 배웠으니 잘 대처할 수 있겠구나 싶다가도 막상 관계가 망해버리면 쉽게 당황해 버린다. 겪어봐야 아는 게 아니라 당해봐야 안다는 말의 의미처럼 여전히 사람 간의 관계는 어렵고 복잡하다.
영화 <화양연화>는 주인공 차우가 오래된 사원의 구멍 안으로 무언가를 속삭이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아마도 그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자신의 비밀을 묻어두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정리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한지와 영주>의 영주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다. ‘이걸 한지에게 전해줘. 이 노트는 한지 거야.’ 소설 속에서 영주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한지에게 자신의 진심이 담긴 노트를 건네었다. 하지만 한지는 끝내 그 노트를 받지 않았다. 결국 노트는 도로 영주에게 돌아왔고, 그녀는 그것을 얼음 속에 묻었다.
“나는 노트를 둥그렇게 말아서 얼음을 캐낸 구멍 안에 넣고 깊이 밀어낸다. 노트는 별다른 저항 없이, 미끄러지듯 얼음 속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적어도 일만 년간 썩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시간 동안 거듭해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그 기억들이 나를 떠나 이 얼음에 붙기를.
레아의 얼굴.
괜찮아, 라는 말.
어둠 속에서 형체가 사라지던 몸과 가끔씩 깜빡이던 눈.
침묵하던 눈과 입.
검고 푸른 피부.
내게서 고개를 돌릴 때의 그 자연스럽지 않던 몸짓.
끝까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내 단순함.
그 위로 흐르는 시간.
단절.
그 모든 것들, 얼음 속으로 떨어진다.
여기에 머물렀다 떠나간 많은 생명들처럼.
로버트 스콧처럼, 코노돈트처럼, 검치고양이처럼, 아르디피테쿠스처럼.
적막하고, 또 적막하게."
- <한지와 영주> 中 -
어떤 조각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어떤 조각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웅크리고 들어가 얼음이 되었다. 언젠가 좀 더 많은 시간이 지나게 된다면 우리가 각자의 조각을 여기 두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조각들을 잘라내고, 묻어두어야 하는 걸까.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관계는 어렵다. 정말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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