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과학 잔혹사'
영화평론가 이동진씨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을 보고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저마다의 직업윤리.” 그렇다면 과학자들의 직업윤리란 무엇일까.
도서 <과학잔혹사>는 눈부신 과학의 발전 뒤에 묻혀 있던 어두운 이야기들을 조명했다. 해적 생물학자 윌리엄 댐피어, 해부학 실습을 위해 불법으로 시신을 거래한 존 헌터, 교류 전기의 위험을 알리고자 동물실험을 한 토마스 에디슨, 매독 연구를 위해 흑인들에게 생체실험을 한 미국 공중보건국 등등. 지식과 탐구라는 명목으로 벌어진 12편의 과학 범죄 사례를 다루고 있는데 가독성과 흡인력이 어찌나 뛰어난지 마치 스릴러 소설을 읽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헨리 스미스먼의 사례였다. 18세기 영국의 박물학자였던 헨리 스미스먼은 표본 수집과 연구를 위해 아프리카로 향했다. 당시 아프리카에는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노예무역이 발달해 있었는데 스미스먼은 이러한 노예 무역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허나 당시엔 아프리카와 영국을 오가는 배가 노예선밖에 없었기에 연구 자금 조달과 본국과의 연락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노예상들과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표본을 영국으로 보내는데도, 원주민들에게 뇌물로 쓸 럼주를 구할 때도 노예상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거기다 오랜 타지 생활로 향수병까지 도지자 스미스먼은 같은 유럽인인 노예상들에게 더욱 의존했다. 나중엔 노예무역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건 연구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어쨌든 간에 스미스먼은 자신이 가장 경멸하던 제도의 일부가 된 것이다.
발명왕으로 익숙한 토마스 에디슨의 사례도 흥미로웠다. 1880년대 에디슨은 테슬라의 웨스팅하우스와 전력사업을 두고 경쟁을 하고 있었다. 에디슨은 직류 발전기를 통해 도시의 불을 밝히려 했는데 직류(DC)는 에너지 손실 문제로 인해 먼 거리까지 전력을 보내기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디슨의 회사는 도시 곳곳에 발전소를 설치해야 했다. 반면 테슬라는 교류(AC) 방식을 주장했는데 이는 직류보다 변압이 용이하여 장거리로 전기를 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처음엔 에디슨이 주도권을 쥐었다. 이미 유명한 발명가였던 에디슨에게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허나 에디슨의 방식은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거기다 프랑스 구리업자들의 담합으로 구리 가격까지 오르자 에디슨은 더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당시엔 전류를 구리선으로 보냈다). 반면 테슬라의 방식은 하나의 발전소만으로도 도시를 충분히 밝힐 수 있어 비용 측면에서 훨씬 유리했다. 고전압으로 전기를 송전한 뒤 소비지역에서 낮은 전압으로 변압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에디슨의 직류 방식은 이것이 불가능했다.
테슬라의 방식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웨스팅하우스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에디슨의 직류 발전기가 장악하고 있던 전력 시장에 교류의 장점이 소문났고 에디슨은 위협을 느꼈다. 결국 교류의 우월성을 체감한 에디슨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실력 대신 홍보를 통해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를 찍어 누르려 한 것이다.
에디슨은 교류가 굉장히 위험하고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걸 알리고자 했다. 그는 동물들을 교류로 감전사시키는 시범을 선보이며 교류가 위험하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 물론 그의 주장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허나 직류 역시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에디슨은 이 사실을 대중에게 숨겼다. 다시 말해 그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직류 발전이 전력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서 동물들의 생명을 이용한 것이다. 덕분에 개 44마리, 소 6마리, 말 2마리가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다.
나중에 에디슨은 사형수에게 쓸 전기의자까지 직접 설계했다. 교류가 사람도 죽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전기의자가 도입된 건 사형수들에게 가급적 편안하고 인도적인 죽음을 선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의자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된 ‘켐러’라는 남자는 도입 의도와 달리 매우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과학의 발전은 우리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수많은 생명을 구했고, 사람들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켰으며, 편리함과 이로움을 가져다주었다. 허나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12편의 과학 범죄 사례를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과학자의 심리를 이해하고 과학자들의 직업윤리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던진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희생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일구어낸 과학적 성과를 인정해야 할까.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쪽 중 무엇이 희생자를 존중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혹은 희생자를 존중하느라 놓치게 될 인류의 실익이 너무나도 크다면 무엇이 더 옳은 선택일까.
한편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건 이러한 딜레마가 비단 과학자들만의 사례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사례를 떠올려보자.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창업하고, 아이폰과 매킨토시를 통해 현대 디지털 시대를 연 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허나 그는 직원들에게 주 90시간 근무를 강요하고,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가차 없이 해고를 단행한 악덕 고용주로도 유명하다. 애플의 성공은 직원들의 고통스러운 희생이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잡스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가 이룬 성과의 수혜자로서 옹호해야 할까? 아니면 한 명의 노동자로서 그의 비윤리적인 방식을 지적해야 할까.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이러한 딜레마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잡기 위해 용의자들에게 고문과 협박을 가했다. 더 이상의 희생자를 막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게 과연 옳은 방법일까?
드라마 <미생>에서 영업3팀은 중동의 한 바이어를 접대하게 되는데 이 바이어는 2차 접대를 좋아하기로 유명하다. 회사에서는 성과를 위해 무슨 수를 써서든(2차 접대를 해서라도) 계약을 따오라고 하지만 오과장은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일은 할 수 없어 갈등했다. 물론 해당 에피소드는 유쾌하게 잘 마무리되었지만 만약 오과장이 끝내 회사의 지시를 거부했다면 어땠을까? 혹은 성과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꺾었다면?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백승수는 매우 합리적인 인물이다. 부당한 지시에는 날을 세우고, 썩은 부분이 있다면 도려냈다. 일도 잘해서 만년 꼴찌의 야구팀을 우승권 경쟁이 가능한 팀으로 끌어올렸다. 허나 그 과정이 늘 윤리적인 건 아니었다. 트레이드를 위해 임동규를 뒷조사해 협박했고, 비난 여론이 드셀 걸 알면서도 병역기피자를 용병으로 데려왔다. 임동규가 원정 도박을 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숨기고 다른 구단과 트레이드했다(덕분에 드림즈는 유망주 2명으로 국가대표 1선발 투수를 얻었다). 이러한 그의 일처리를 두고서 극중 한 인물은 백승수가 이기는 것밖에 모르는 목적지향적인 인간이라며 일갈했다.
이렇듯 우리 역시 살면서 이러한 선택의 순간을, 혹은 목적의식에 취해 도를 넘은 빌런들을 맞닥뜨릴 수 있다. 이는 앞서 소개한 과학자들의 딜레마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가령 직장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수단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만약 그 과정에서 (<미생>의 ‘2차 접대’처럼)비윤리적인 방법이 사용되었다면 그 성과는 인정해야 할까. 인정하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쪽 중 무엇이 더 당사자들을 존중하는 방법일까. 혹은 당사자들을 신경 쓰느라 놓치게 될 조직의 이익이 너무 크다면 무엇이 더 옳은 선택일까.
최근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회사의 절차에 따라 실장님과 면담을 진행했다. 형식적인 말 몇 마디가 오가고 그는 내게 이후의 계획을 물었다. 처음부터 이직을 계획한 퇴사였다면 모르겠지만 이번 퇴사는 그게 아니었기에 특별히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여러 가능성을 두고 고민 중이라는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가만히 내 말을 듣던 실장님은 모처럼 쉬게 되었으니 이번 기회에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건 어떨지 제안했다.
퇴사를 앞두고 이런저런 상담을 많이 받긴 했지만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대부분은 이다음은 어디 회사로 갈 건지,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등을 물었다. 마침 이 책을 한창 읽고 있던 때라서 그 말이 더욱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회사에 가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일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들에겐 당장의 다음 행선지보단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는게 장기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며.
어떤 이야기는 책장을 덮은 후에 비로소 시작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앞으로 무수히 주어질 선택의 순간들에 무엇으로 응수해야 할까. 아무래도 이번 이야기는 그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꽤 오래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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