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외로움의 함정'
지금은 아니긴 하지만, 나는 원래 비혼주의자였다. 이 생각을 바꾼 데에는 군대에서의 경험이 주효했다. 나는 의무소방원이었다. 2023년 이후로 없어져서 생소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쉽게 말해 의경 같은 거다. 다만 소방서에서 먹고 잘뿐이었다.
당시 나는 주로 구급차를 탔다. 덕분에 현장에 나갈 기회가 많았는데 만난 환자들의 대부분은 홀로 사는 노인 분들, 혹은 중장년의 남성들이었다. 하루는 허리가 아프다는 어떤 할머니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던 그녀는 하루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냈다. 오죽하면 현관문도 열어주지 못해서 우리가 직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끼니 같은 건 어떻게 챙기시냐고 물었더니 사회복지사와 간병인이 이틀에 한 번 꼴로 번갈아 방문하면서 도와준다고 했다.
그래도 이런 분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어쨌거나 정기적으로 찾아와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 반면 그마저도 없이 홀로 방치되는 이들도 있었다. 안타깝지만 내 경험 상 그런 분들 셋 중 하나는 환자가 아닌 망자(亡者)로 발견되었다. 지병이나, 사고의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극단적인 길을 택한 케이스였다. 중장년층이 가장 많았고, 열여덟 살짜리 고등학생도 있었다. 그중에는 죽은 지 한참 뒤에 발견된 이들도 있었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두 달 정도?
이런 경험이 쌓일 때마다 내 안에서는 불안한 감정이 싹텄다. 저들의 현재가 나, 혹은 내 부모님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몰려왔다. 혼자 산다는 게 생각보다 멋진 일이 아니구나.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자기관리를 열심히 한다고 한들 홀로 방치되어 있다면 저렇게 연약해지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구나. 이는 단순한 감상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자 실존적인 공포였다. 얼마 후 나는 두 가지 결심을 했다. 결혼을 해서 가족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과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홀로 두지 않겠다는 결심.
이후로 벌써 6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과 결심은 여전히 뚜렷하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을 만났다. 도서 <외로움의 함정>은 외로움이 심화되었을 때 삶에 어떻게 균열을 내는지 다양한 사례로 설명한다. 나아가 외로움에 대한 문제 인식을 사회구조적으로 확장시켜, 현대사회 속 인간관계의 결핍과 정서적 고립을 날카롭게 조명하며 외로움이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본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외로움을 일시적인 감정 문제로 두지 않고 병리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 외로움을 느낄까? 혼자 있을 때?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외로움을 안 느낄까? 일례로 내가 만난 어떤 망자는 방문 밖에 가족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다시 말해 외로움의 척도는 사람과의 물리적인 거리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서적인 고립 여부가 더 중요하다. 당장은 혼자 있더라도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외로움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적다. 반면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그들로부터 정서적인 안정감/만족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진심을 터놓고 대화할 이가 없다면 외로움의 함정에 쉽게 빠진다.
한편 저자는 외로움을 증상에 따라 3단계(일상적 단계-심화적 단계-고립적 단계)로 구분했다. ‘일상적 단계’에서 외로움은 가벼운 감기와 비슷하다. 잠깐은 우울할 수 있겠으나 쇼핑, 영화 감상, 친한 친구와의 대화 등의 행위를 통해 비교적 쉽게 해소할 수 있다.
‘심화적 단계’에 이르면 외로움은 일상생활에 지장을 초래한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우리를 외롭게 만든 특정 사건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심화적 단계에 접어들었다면 그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올 순 없으니까. 여기에 대해 저자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상담을 통해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비록 완벽하진 않더라도 사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실직을 했다면 재취업을 하고, 친구와 이별했다면 새로운 관계를 통해 달라진진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
마지막 ‘고립적 단계’에 이르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고 사회적 연결도 단절된다. 환자들은 더 이상 나아지기를 포기하고 주변의 도움마저 거부한다. 이때부터는 국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환자가 의지를 갖지 않는 상황에서 자발적인 행위나 노력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대응을 통해 고립자들이 거부감을 깨고 사회의 개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중 저자가 가장 관심을 쏟는 건 ‘고립적 단계’다. 그건 이 책의 두 번째 특징과도 연결된다. <외로움의 함정>은 외로움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 산업화, 핵가족화, 저출산고령화, 자본주의, 디지털 기술의 발전 등 현대사회의 주요한 흐름이 인간을 외롭게 만들었는지 낱낱이 분석한다.
일례로 자본주의와 무한 경쟁 체제는 청년층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부담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주었다. 중년층의 경우 경제구조 변화와 기술 발전으로 인해 조기 퇴직을 강요받는 일이 늘어나면서 경제적으로 불안해졌다. 또한 가부장적 문화로 대표되는 기성 사회제도가 붕괴하면서 새로운 사회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정신적인 고립에도 쉽게 노출되었다. 정보화 기술과 AI의 등장은 노인들이 갖고 있던 풍부한 경험과 지혜의 가치를 떨어뜨렸고,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등장한 키오스크, 챗봇, 온라인 예약 서비스는 오히려 노인들의 사회참여를 방해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오늘날의 외로움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 보기가 어렵다. 이건 구조의 문제다. 앞서 내가 말한 허리디스크 환자의 사례를 떠올려 보자. 그날 그녀는 홀로 끙끙 앓다가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 간신히 119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에겐 두 딸이 있었지만 상황을 알릴 방법이 없으니 있는 것만도 못했다. 이따금씩 안부 차 찾아뵙는 것을 빼면 그녀에게 가족은 사실상 없는 존재였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녀의 두 딸을 비난할 수 있을까? 갈수록 사회는 파편화되고, 개인화되어간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각자도생의 시대에 그녀의 두 딸 역시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 곁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분투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변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몰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외로움이라는 사회적 재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저자는 5단계(자기방임 탈피 - 고립 탈출 - 생활 관계의 확대 - 생활 범위의 확대 - 생활의 회복 시작)로 이루어진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때 중요한 건 문제 해결의 관점을 금전적인 생계 지원 등으로 한정하여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고립적 단계에 있는 환자들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 자체가 떨어져 있는 상황이므로 경제적인 조건을 포함하여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를 포함한 생활 전반에 걸친 통합적인 계획을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사회적 처방’이라는 개념이다. 쉽게 말하자면 ‘연결고리가 약해진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처방한다’는 뜻이다. 사회적 처방의 목적은 고독이나 빈곤의 문제를 의료기관을 포함한 다양한 지역 조직과 연결하는 것에 있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영국과 일본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링크워커’라는 지역의 사회적 처방 활동가를 적극 활용한다. 이들은 사회적 처방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적합한 지역 활동(워킹 클럽, 요리 교실, 봉사 활동 등)을 소개하거나 각종 사회적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환자들이 사회적 연결 고리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반면 일본은 정부 주도로 전국적인 상담기관과 비영리 활동을 연계하여 주거 지원, 생활 빈곤자 지원, 푸드 뱅크, 자살방지 대책의 지원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지역 의료기관을 중심으로 영국의 링크워커와 같은 사회적 처방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물론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사례인지는 쉽게 말할 수 없다. 각 나라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건 두 국가 모두 외로움을 국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제도는 물론 사람들의 인식도 뒤처져 있다. 외로움은 우울증 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외로움과 고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구조자는 119만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119가 구하지 못하는 생명도 있는 법이다. 그런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지금 당장 곁에 있는 사람뿐이다. 만약 함께 있는 이들이 지쳤다면 온 사회가 나서주어야 한다. 119는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그들을 설득해 돌려보내고, 그들의 가족은 네 잘못이 아니라며 용기를 복 돋아야 한다. 이웃과 친구들은 그들이 다시 돌아온 일상에 무사히 적응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공동체는 그들이 처한 비극적 상황이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는 아닌지 함께 고민하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 지나친 호들갑 아니냐는 소리가 들려와도 어쩔 수 없다. 생명을 구한다는 건 원래 그런 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소방서에서, 외로움에 스러지는 사람들을 보며 위와 같은 글을 쓴 적 있다. 그리고 6년이 지났다. 그동안에도 많은 이들의 빛이 꺼져갔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그때보다 더 심해졌을 수도 있다.. 외로움에 스러지는 이들을 더 많이 보게 될까 두렵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 미래는 머지않아 우리 곁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7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