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직 끝나지 않은 피난

영화 '시라트'

by 뮤노

“제발 그만하라고.” 비명이 입속을 가득 채웠다. 허나 이곳은 극장이다. 그 소리를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다. 애매한 신음 소리만 입술 사이로 간신히 새어 나왔다. 빠져나오지 못한 나머지 비명들은 혈관을 타고 머리로 올라가 두통을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부여잡았다.


여기가 내 방이었다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화면이 스마트폰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일시정지를 눌렀을 텐데. 영사기는 야속하게도 제 할 일을 지속했다. 화면 속에서 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낮게 깔린 베이스가 영화의 음향효과인지, 내 심장 박동인지 헷갈렸다. 아, 그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지금 극장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그 빌어먹을 사막에 있구나. 나도 지금 그들과 함께 걷고 있구나. 나 역시 전쟁에 한가운데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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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사라진 딸을 찾아 아들과 함께 레이브 파티에 온 루이스. 하루 종일 전단지를 돌렸지만 딸을 봤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포기해야 하나 막막한 와중에 파티 참가자들로부터 사막에서 또 다른 레이브 파티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루이스는 그곳에 딸이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다.


한편 전 세계엔 점차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급기야 한 무리의 군인들이 레이브 파티장을 찾아와 안전을 이유로 파티를 중단시켜 버린다. 이에 일부 참가자들은 사막의 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군인들로부터 도망치고, 딸을 찾으려는 루이스도 그들을 따라나선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떠올린다.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지만 끝내 그 거대한 흐름에 쓸려 내려간 한 남자의 이야기. 두 눈을 뽑고 광야를 떠도는 동안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천륜까지 저버렸던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는 스틱스강에서 자신을 죽인 이가 친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감정이었을까. 영화 <시라트>를 보고 내가 맨 처음 떠올린 건 이 두 남자의 초라한 뒷모습이었다.


영화 <시라트> 속에서 세상은 전쟁을 앞두고 있다. 단순한 분쟁일 수도, 혹은 영화 속 아나운서의 말마따나 제3차 세계대전의 전조일 수도 있다. 여하튼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사람들은 사막에서 춤을 춘다. 그중 가장 대책 없는 건 주인공 일행이다. 군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막의 파티에 가기 위해 기어코 피난 대열에서 이탈했다. 이곳처럼 사막의 파티도 다른 군인들에 의해 취소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여정의 중간에 주인공 일행 중 한 남자는 인형극을 하며 탈영병에 관한 노래를 불렀다. 인형의 정체는 남자의 반쪽짜리 다리다. 이렇듯 정확한 언급은 없지만 주인공 일행 중 상당수는 전쟁에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그들이 가려는 레이브 파티의 초기 표어도 전쟁과 대척되는 “PLUR(Peace, Love, Unity&Respect)”다. 다시 말해 그들 역시 전쟁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이들의 무모한 일탈이 사실은 피난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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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인공 일행은 어느 순간 자신들이 이미 전쟁의 아가리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트럭과 짐만 남기고 사라진 사람들(정황 상, 짐을 챙길 틈도 없이 급하게 떠나야 했던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주인공들의 간절한 부탁을 무시하고 떠나버린 목동(세상이 전쟁 중이니 도움을 핑계로 접근하는 적군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화의 중후반 사막에서 몰아치는 비극들까지.


이를 두고 누군가는 이야기의 전개가 부실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건이 뜬금없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여정이 사실 피난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전개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전쟁 중 피난민들에겐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밥을 먹다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질 수도, 산책 중 지뢰를 밟아 온몸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영화의 제목이 아랍어로 천국과 지옥을 잇는 가느다란 다리를 뜻하는 ‘시라트’인 것도 바로 그래서다(실제로 영화 속에선 ‘선’으로 투영되는 이미지가 여러 번 등장한다. 사막의 좁은 도로, 절벽 위 좁은 산길, 그로 인해 일렬로 늘어선 차량의 행렬 등등). ‘우연’을 가장한 가혹한 폭력. 참혹하지만 그게 바로 전쟁이다. 그래서 더욱 허망하다.


그렇다면 그 여정의 끝은 해피엔딩일 수 있을까. 글쎄,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아니다. 해피엔딩이 되려 했다면 카메라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건 ‘어떤 장소’여야 했다. 주인공들이 가려 했던 레이브 파티장이든, 아니면 피난민 캠프이든. 허나 주인공들은 마지막까지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심지어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아직도 시라트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제 겨우 하나의 챕터가 끝났을 뿐 비극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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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영화 이론’ 같은 수업을 들으면 꼭 나오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에디슨이 만든 ‘키네토스코프’고, 다른 하나는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시네마토그라프’다. 둘 다 영화를 볼 수 있는 기계다. 시기는 에디슨 쪽이 더 빨랐다. 하지만 사람들은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시네마토그라프를 영화의 출발점으로 본다. 그 이유는 영화를 상영하는 방식에 있었다. 키네토스코프는 한 번에 한 사람만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시네마토그래프는 극장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영화를 보았다. 다시 말해 영화란 극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도록 만들어진 예술인 것이다.


오늘날에 이러한 영화의 의미는 퇴색되고 있다. 극장에는 볼 영화가 없고, 그나마 관심 가는 작품들은 OTT에서 먼저 공개를 해버린다. 사람들도 더 이상 극장을 찾지 않는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니 극장들도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그런 와중에 <시라트> 같은 작품의 등장은 매우 반갑다. 적어도 이 영화만큼은 OTT가 아닌 극장에서 봐야 한다.


일단 ‘사운드’가 다르다. 묵직한 EDM이 극장의 음향 시스템을 만나 관객의 혼을 쏙 빼놓는다. 물론 EDM을 싫어한다면 괴로울 수 있겠으나 그 감정조차 영화의 일부가 된다. 영화를 보다 보면 EDM이 어느 순간 폭격 소리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땐 내가 주인공들과 함께 전장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다. 혹은 EDM이 누군가의 심장 박동처럼 들리기도 한다. 혼란한 와중에도 아직 살아있다는 듯 쿵쿵거리는 이 소리는 주인공들이 추는 춤을 살아남으려는 애처로운 발버둥으로 만든다.


<시라트>는 괴로운 영화다. 영화를 보는 동안 일시정지를 누르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허나 극장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그저 숨죽인 채로 이 비극을 감내해야 한다. 이건 단순한 감상이 아닌 극단적인 체험이다. 2시간 동안 우리는 극장이 아닌 그 빌어먹을 사막에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이 비극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상영관을 떠나는 순간, 떠오른 건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이 아니었다. 주인공들이 마지막까지 시라트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현실의 우리 역시 아직 그 다리 위에 있다. 크고 작은 전쟁들. 위태로운 세상. 우리는 과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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