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_그녀에게 바람이 불었다 Part.1

#곡성#나홍진#2016

by 뮤노

§ 곡성 THE WAILING, 2016

감독 : 나홍진 / 배우 : 곽도원, 황정민, 천우희, 쿠니무라 준


평화롭던 시골마을에 끔찍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경찰은 이를 야생버섯의 중독에 의한 사건으로 잠정 결론짓는다. 하지만 ‘종구’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경찰의 조사 결과가 믿기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종구는 후배로부터 이 사건에 얼마 전 마을에 들어온 일본인이 연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한편 종구의 하나뿐인 딸인 ‘효진’은 언제부터인가 이상 증세를 보이고, 이에 종구는 용한 무당인 일광을 마을로 부른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 <싱글맨>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잠에서 깨는 것은 있다와 지금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니 나는 잠에서 깬다. 나는 여기, 나의 집에 있다. 지금은....... 지금 몇 시지?


방광을 비우고 찝찝한 구취를 제거하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시작한다. 나 같은 야행성에게 아침은 물 한 잔으로 족하다(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세상은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브런치'라는 것을 개발해 주었으니). 문득 시선이 닿은 책상은 마치 폭격이라도 얻어맞은 양 암담하다. 밤샘 작업의 폐해다. 차마 치울 엄두가 나질 않아 노트북만 쏙 빼온다.


차분히 부팅을 기다리며 전날 작업을 위해 꺼두었던 핸드폰을 켠다. 지잉, 지이잉. 시끄럽게도 울려댄다. 내 인간관계가 이렇게나 두터웠던가? 충실했던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한 번에 62통이나 되는 메시지들을 읽는 건 별로 유쾌할 것 같진 않다.


조용히 핸드폰은 구석에 던져두고 노트북에만 집중한다. 습관처럼 SNS 창을 띄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나의 연인은 내가 없는 어제에 어떤 하루를 보냈으려나. 수많은 팔로워들의 목록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 클릭한다.


....... 두근두근, 지이잉. 두근두근, 지이잉. 두근두근, 지이잉.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 <싱글맨>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잠에서 깨는 것은 있다와 지금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잠에서 깬 나는 여기, 나의 집에 있다. 그리고 지금...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바람이 불었다.


<1일째>

뚜르르. 뚜르르. 이번이 벌써 여섯 번째다. 보낸 카톡은 여전히 확인하고 있지 않다. 아침이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면서 나는 이해해야 되는 걸까. 아님 그저 나를 피하기 위한 그녀의 임시방편 책략인 걸까. 이른 아침부터 핸드폰을 들뜨게 한 문자들을 훑는다. 나의 친구들부터. 그녀의 친구들까지.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지금 이 노란 창 안에 한데 모여 있는 것만 같다. 우려와 불신에 탄식과 애도까지. 갖가지 감정들이 뒤엉켜 있으나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다시 전화를 건다. 일곱 번째 전화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받지 않는다. 드라마를 보면 이럴 때 보통 핸드폰을 집어던지던데. 그리고 절규하고 울면 되는 건가. 하지만 나는....... 아니다. 다만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나를 두고서 뻔뻔하게 다른 남자와 ‘연애 중’을 걸어놓는 그녀의 의중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납득할 만한 이유다. 그녀가 내 전화를 받질 않겠다면, 나에겐 그녀의 친구들이 있다.


한지민양.

아, 이쪽이에요. 오랜만이에요, 정오씨. 저기... 괜찮아요? 저도 잘....... 저도 많이 놀라서요. 아뇨, 모르는 사람이에요. 네... 수연이요? 글쎄요. 저도 수연이랑은 연락을 잘 안 해서. 그렇긴 하죠. 셋이서 자주 만나긴 했죠. 근데 제가 수연이한테 연락을 먼저 한 적은 거의 없어서요. 정오씨랑 같이 볼 때도 수연이가 먼저 불러줘서 나간 거예요. 사실 학교 다닐 때도 같이 대화한 적도 별로 없는걸요. 미안해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네... 그럼 들어가세요.


정윤아양.

여보세요? 정오씨? 수연이요? 글쎄요. 지금쯤이면 가게에 있지 않을까요? 병가요? 이상하네. 어젠 별로 아파 보이지 않았는데. 근데 수연이는 왜요? 네? 아... 두 사람 헤어진 거 아니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수연이가 요즘 정오씨 이야기를 잘 안 해서... 그래서 어제 수연이 SNS 보고 둘이 헤어졌나 싶었죠. 설마요. 수연이가 그런 얘는 아닌데....... 혹시 둘이 싸웠어요? 수연이한테 한 번 전화해보세요.


김가영양.

그래서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저 금방 들어가 봐야 해요. 용건만 말해요. 수연이요? 글쎄요. 일하고 있지 않을까요? 근데 수연이는 왜요? 아, 그거요? 봤어요. 근데 정오씨가 그걸 왜 신경 쓰는데요? 남자친구요? 두 사람 사귀었어요? 수연이한테 그런 말은 못 들었었는데. 설마요. 이래 봬도 10년 지긴데....... 정말 둘이 사귄 거 맞아요?


이예진양.

미안해요. 정오씨랑은 별로 통화하고 싶지가 않네요. 솔직히 수연이... 정오씨가 많이 부담스럽데요.


김연미양

........ .......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너는 도대체 누구니.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사람은 정말 네가 맞는 거니. 바깥은 벌써 저녁이다. 다시 전화해 봤자 지겨운 수신음만 들을 게 뻔하다. 내가 보낸 메시지 옆의 숫자 ‘1’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혹시 너는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의 사람인 거니. 그래서 훌쩍 사라져 버린 거니.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핸드폰 좀 그만 봐. 그래봤자 네 속만 버려.”


승민이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챈다. 나 대신 쓰게 웃으며 그는 잔에 술을 따른다. 고기를 구우며 가만히 내 눈치를 살피던 녀석들의 얼굴엔 아침에 메시지에서 보았던 감정들이 제각기 떠 있다. 우려와 불신. 탄식과 애도.

누군가 ‘짠’을 외친다. 마치 갓 전입 온 이등병마냥 다섯 개의 손들이 일사불란하게 모였다가 흩어진다. 나는 가만히 고기가 타들어가는 걸 보지만 딱히 의도한 건 아니다. 다만 시선이 갈 길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혀를 적신 소주는 쓰기만 하다. 잔을 내려놓고 승민이 내게서 가져간 핸드폰을 도로 집어온다.


“바람, 뭐 그런 건가”

“난 솔직히 수연씨가 그럴 줄은 몰랐어. 나쁜 년. 정오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만해.”

“수연씨한테는 아직 연락 없디?”

“........”

“와, 수연씨 완전 악질이네. 바람에 이젠 잠수까지?”

“그만하라고! 여기서 제일 힘든 사람 정오다. 가뜩이나 심란할 텐데 자꾸 건드릴래?”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침묵. 그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듯 잔들은 다시 빠르게 채워진다. 그리고 다시 한 잔. 탄식을 닮은 소리가 각자의 입에서 쏟아진다.


“근데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수연씨는 갑자기 왜 그랬대? 너희 별로 싸우지도 않았잖아.”

“맞아. 혹시 서운하게 한 거라도 있어?”


그러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걸까. 그래서 그녀는 지금 자기만의 방식으로 내게 벌을 주고 있는 걸까. 문득 출입구를 바라본다. 저 문을 열고 그녀가 들어오는 상상을 한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우리 테이블을 향해 다가온다. 그녀는 바로 내 앞자리에 앉는다. 새로 주문한 소주를 까면서 그녀는 내게 해맑게 묻는다. 반성은 좀 했어?


“아니....... 너야말로 나한테 왜 그랬니?”



<2일째>

그러니까 그날, 그녀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특별히 싸운 일은 없었다. 오히려 마감에 쫓기느라 연락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내게 서운함을 토로했던 것도 아니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같이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었다. 불과 전날만 하더라도 맘에 드는 호텔을 찾았다며 좋아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혹시 내가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그런 걸까? 하지만 지금의 회사를 추천해 준 건 애초에 그녀였다. 매번 마감에 쫓길 때마다 연락 한 번 하지 못하는 나를 두고서 오히려 능력 있는 남자 같아 멋있다면서 좋아해 주던 그녀였다. 여자의 변덕, 뭐 그런 건가? 뚜르르. 뚜르르. 이제는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래,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거지. 그렇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아아, 유미씨. 오랜만이에요. 요즘 장사는 잘 돼요? 저요? 제가 화장품 가게에 화장품 사러 오지 왜 오겠어요. 수연이 줄 선물 좀 고르려구요. 근데 오늘은 수연이가 안 나왔나 보네요. 병가요? 오늘도요? 아... 혹시 그럼 전화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제께 고장이 나서... 네? 뭐라구요? (수연이 좀 그만 괴롭히라구요!) 제가 수연이를 언제 괴롭혔다고... 그냥 걱정 돼서 그래요. 아프면 악이라도 들고 찾아갈까 하고. 뭐요? 제가 뭘 모르는데요. 헤어졌다고요? 도대체 누가 그래요? 저기요, 유미씨. 유미씨!


.

.

.


“수연이 남자친굽니다. 좀 만날 수 있을까요.”



Part.2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9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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