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나홍진#2016
그녀의 남자를 만난다. 사람들로 가득한 카페에서 그 개새끼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겐 그의 사진이 있으니까.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그의 이름을 입에 넣어 발음해 본다. 그가 나를 올려다본다.
“반갑습니다. 수연이 남자친구, 신정오입니다.”
무심하게 손을 내민다. 얼결에 악수에 응하는 그의 입가가 뒤틀려 있다. 불쾌함이다. 그는 그걸 굳이 내게서 숨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렇게 나와 줄 수밖에.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수연이랑 어떤 사이시죠?”
“.......남자친굽니다.”
이것 봐라?
“재밌네요.”
“........”
“서로 바쁜 몸이니까 길게 잡아 두진 않을게요. 수연이 어디 있나요?”
“그걸 왜 저한테 찾으시죠. 수연씨라면 집에 있겠죠. 아님 가게에 있거나.”
내가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이 병신아.
“그럼 다른 걸 물을게요. 이틀 전에 수연이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나 본데...”
“대답해요.”
“.......수연 씨랑은 두 달 전에 처음 만났습니다. 저희 회사랑 수연씨 가게가.......”
“말 돌리지 말고. 이 새끼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거나 설명하라고.”
그가 아니꼽게 나를 노려본다. 근데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여기서 가장 패주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거든.
“제가 고백했습니다. 수연씨는 받아줬구요.”
“내가 있다는 거 알았을 텐데?”
“몰랐습니다.”
“거짓말.”
“사실입니다. 수연씨는 당신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거짓말하지 말랬지. 수연이가 그랬을 리 없잖아. 2달 전에 만났다고? 나랑 수연이, 함께 한 시간만 자그마치 2년이야. 당신 말이 사실이더라도 그게 수연이 진심일 리가 없...”
그가 한숨을 쉰다. 감히 사람을 앞에 두고서. 기분 나쁘게.
“이제야 알겠네요. 수연씨가 전 남자친구에 대해 말하긴 했었죠. 항상 자기 멋대로인 데다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믿고 싶은 대로만! 그게 누군가 했는데 바로 당신이었어. 수연씨가 그럴 만도 해.”
“뭐요?”
“당신이 수연씨 남자친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더는 수연이 괴롭히지 마세요. 만약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그땐 이렇게 말만으론 끝나지 않을 거야.”
“내가 뭘 마음대로 믿어! 먼저 건드린 사람이 누군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르는 새끼랑 사귄답시고 자랑하는 그년이 문제지! 그것도 나랑 사귀고 있으면서 변명 한 마디 없이! 근데 그것이 어떻게 내 탓이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놈의 멱살을 잡는다.
“말해, 이 새끼야. 니들 두 년놈이 도대체 무슨 작당을 벌인 건지 말하라고, 이 새끼야!”
그의 얼굴에 주먹을 휘두른다. 멀대 같은 녀석이 그대로 나가떨어진다.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누군가의 비명과 고함, 경찰을 운운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까지. 그러나 뒤집어진 눈은 오로지 그 개새끼만 보인다. 감히 남의 여자를 넘보는 파렴치한 씹새끼.
그날 저녁, 수연이에게서 전화가 온다. 얼얼한 주먹에도 하루 종일 기다린 그녀의 목소리는 혼곤한 낮잠처럼 반갑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는 그저 침묵한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려나. 불안이 저 밑에서부터 일렁거리기 시작할 즈음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연다. 내게 시간을 묻던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내일 좀 만나.
커피는 천천히 식어가고 있다. 내가 너에게 고백했던 그 카페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몰랐던 그 시절을 향해 천천히 거슬러 올라간다. 너와 그 남자의 사이에는 ‘연애 중’이 걸려 있다면 너와 나 사이에는 ‘침묵 중’이 걸려 있다.
“석원씨 찾아갔다면서? 내 친구들도 만나고 다니고. 도대체 사람이 왜 그래?”
“너랑 연락이 안 되니깐. 남자친구라면 그런 거 당연한 거야.”
“남자친구....... 웃긴다. 그래서 나는 왜?”
“아픈 건 좀 어때?”
“말 돌리지 마. 두 번 말하는 거 싫어.”
그렇게 직진이 좋으시다면야. 기꺼이.
“SNS 봤어.”
“그래서?”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 안 드니?”
“내가 뭘 설명해야 하는데? 오빤 이미 그렇게 확신하고 있잖아. 오빠 널 두고 내가 다른 남자랑 바람핀 거라고. 그래서 석원씨 찾아간 거잖아. 내 친구들도 들쑤시고 다니고. 아냐?”
“아냐.”
“거짓말. 오빤 내가 바람피웠다는 의심을 확인하러 온 거야.”
“아니라고 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냥 납득이 안 돼서 그래. 너랑 나 뻔히 사귀고 있으면서 SNS에 그런 걸 올린 널 이해할 수 없을 뿐이라고!”
그녀가 날 바라본다. 저 투명한 눈동자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에 대한 애정? 아님 그 사람에 대한 애정? 혹은 둘 다 아니라면 나에 대한 경멸일까. 설령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래서? 내가 설명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만약 니가 그런 게 아니라고, 그날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제대로 설명하고 오해를 푼다면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우리가 다시...? 뭐를? 사랑을?”
“그래. 다시 돌아갈 수 있어.”
고요하다. 잔굽을 긁던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임을 멈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선 전등 빛이 일렁인다. 슬그머니 접힌 그녀의 손가락은 손을 따라 그녀의 무릎에 도달한다. 내가 보이지 않는 책상의 밑에서 그녀는 손톱을 뜯고 있을까. 서로를 부딪혀 뚝뚝 소리를 내는 손톱들을 상상한다. 그때 그녀가 웃음을 터뜨린다. 폭소? 황당? 아니면 혹시 눈동자 뒤에 숨어있던 경멸일까? 입을 가리고서 그녀는 쿡쿡거린다. 그 조용한 웃음을 나는 좋아했었다.
“웃긴다. 그래. 오빤 늘 그런 식이었지.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믿어버리고.”
“.......?”
“여보세요, 신정오씨. 착각하셨나 본데 나 여기 오빠한테 사과하고 용서 빌러 온 거 아냐. 헤어지자고 말하려고 온 거지.”
“뭐?”
“어떻게 말할지 고민 많이 했는데, 덕분에 쉽게 해결됐네. 잘 가. 어차피 구질구질할 거 서로 피차 피곤할 일 없게 더는 연락하지 마. 오빠 집에 있는 내 짐은 버려도 좋아. 그걸로 오빠 기분이 풀린다면야. 그럼 안녕.”
그녀가 나를 떠난다. 마치 꿀이라도 목구멍에 던져놓은 양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안쓰럽게도 나는 그녀의 발자국을 좇아 허우적거릴 뿐이다. 비틀거리면서 그녀를 따라 카페를 나선다. 그녀는 벌써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신호가 바뀌고 그녀가 길을 건넌다. 길의 끝에는 그 남자가 서 있다. 그 남자를 향해서 그녀는 환하게 웃는다. 안긴다. 손을 잡는다. 가지 마. 기어코 터져 나온 목소리는 바람 빠진 튜브마냥 질척거린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게 나를 영영 떠나 버린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다’라고 말한 이는 누구였던가. 그렇다면 그렇게 자라 성체가 된 사랑은 어디로 가는가. 사랑하는 이를 홀린 사랑 받는 이에게로 향하던가. 만약 그런 거라면 남아있는 이는 어떻게 되는가. 모든 양분을 사랑에게 주느라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그는 어떻게 되는가. 타인의 열망이 빚어낸 또 다른 사랑을 기다리던가. 그래서 어떤 가수는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라며 노래했던가.
나는 너를 사랑했지만 너는 내게서 완성된 그 사랑을 챙겨 홀로 떠났다. 빈 껍데기가 되어 가슴을 풀어 해친 채 나는 답을 구한다. 사랑의 본질이란 원래 그런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모르는 어딘가에 이유는 분명히 있다. 너는 그걸 틀림없이 알고 있다. 내가 사랑을 모를 리 없다. 나의 잘못이 아니다. 나쁜 건 너다. 그러니까 대답해. 도대체 이유가 뭔지. 이 악마 같은 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