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_새로운 식구

2018.08.24. (D-151)

by 뮤노

얼마 전 소방서에는 새 식구가 들어왔다. 새 식구는 눈이 마치 서양인마냥 눈이 새파랗지만 몸집은 너무나도 작다. 기껏해야 손바닥만 하려나. 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흰색과 황금색이 조화롭게 어울린 옷을 입고 꽁냥거린다. 그래도 제법 기세가 있어 목소리는 우렁차다. 아마도 수컷일까. 아니다, 21세기에 아무리 고양이라도 암컷이 조신하기만 하란 법은 없지.




어느 날, 밤에 사무실로 낯선 손님이 방문했다. 스무 살을 넘겼을 지가 의심되는 앳된 얼굴의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제 몸의 폭보다도 큰 상자를 품고 있었다. 상자엔 쪽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낑낑거리는 가냘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쪽지에는 동글동글한 손글씨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그 중 하나를 나는 입에 넣어 발음해보았다. 고양이 집사 구함.......?


상자를 들여다보니 조그만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거기 있었다. 태어난 지 고작 한 달이나 되었을까. 아직 어미젖은 떼기나 했을 런지 의심이 되는 어린 길냥이는 제 덩치보다도 훨씬 큰 검은 눈의 동물을 바라보며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여학생이 말하길, 녀석은 쓰레기 봉지 틈바구니에서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고 했다. 누군가 쓰레기로 착각하고 갖다 버릴까봐 미처 두고 보진 못하겠고, 그렇다고 본인이 데리고 있기엔 사정이 허락지 않아 소방서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아니, 이런 유기동물은 동물보호소로 데리고 가셔야죠.......'라는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는 그녀에게 차마 그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무실의 직원 모두가 난감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마 그녀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보호소로 가는 대부분의 동물들이 어떤 미래를 맞이하는지를. 그러니 그녀는 이 아이가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보호소가 아닌 소방서로 온 듯 했다.


창밖에는 밤비가 나긋하게 속살거렸다. 누군가 일단 받아보라는 말에 구급대원 반장님 한 분이 상자를 그녀에게서 받아 들였다. 일단 오늘밤은 소방서에서 재워 보고, 내일 나머지를 결정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그 여학생은 환한 미소로, 다시 한 번 잘 부탁한다는 인사와 함께 어둠이 추적추적 내리는 바깥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고양이는 그날 밤을 여성구급대원실에서 직원 한 명과 함께 보냈다. 다음날, 고양이를 발견한 센터장은 나와 내 후임에게 무심히 말했다. "한 번, 잘 키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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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짬에 집사라니. 또 소파 밑이라도 굴러다니다 온 건지 온 몸에 검댕을 묻혀온 녀석을 씻기며 나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괜한 마음이 들어 직원들이 괘씸해졌다. 정작 키우기로 결정했으면서 집 지어주기, 밥 주기, 씻기기, 대소변 치우기 등등. 온갖 집들을 죄다 우리에게 몰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고양이 집은 상자 하나를 구해다가 우리의 수건을 푹신하게 깔아 만들어 주었다. 고양이가 먹는 분유와 사료, 하물며 사용하는 젖병도 우리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씻기는 데 사용하는 바디워시도 우리가 쓰는 보급품을 희석해 만든 것이었다. 결국 귀찮은 일은 모두 우리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떡이나 먹겠다는 심산이지? 한 생명을 돌보는 일에 책임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네들의 처사가 배알이 꼴려 한번은 입양을 시켜볼까 하여 젊은 직원들을 꼬드겨 보았다. 그러나 센터장의 반대로 모두 무산으로 돌아갔다. 짜증나기 짝이 없는 나날이다.


하지만 목에 감긴 줄을 풀어주러 온 내가 마치 밥이라도 주는 줄 알았던 양 친근하게 손바닥에 얼굴을 부비 대는 녀석을 보다보니 미운 마음도 어느새 가신다. 그래, 어린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겠니. 손가락으로 볼을 툭툭 건드리자 이번엔 놀아주는 줄 알았던 양 누워서 배를 까 보이더니 손가락을 잡아보고자 애를 쓴다. 어느덧 분유 한 통을 거의 비워가는 녀석은 요 며칠 새 쑥쑥 자라 몸집이 손목까지 올 정도다. 조금 있으면 사료를 물에 불려 먹여도 될 것 같았다. 사람을 무서워하던 그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젠 누군가 지나가기만 하면 신나게 달려 나와 장난을 거는 모습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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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다 보니 우리 집 고양이 '보리'가 생각났다. 내가 16살이었을 쯤에 데려왔으니 벌써 7~8살은 되었다. 사람 나이로 치자면 이미 중년에 접어들고도 한참이었다. 장난보다는 잠이 더 좋은, 날렵한 몸매는 어디 두고 후덕한 몸을 뒹굴 거리는 그런 아저씨 고양이.


그런 '보리'가 우리 집에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하자면 제법 길었다. 어릴 적에 동물을 좋아해 사육사를 꿈꾸던 내 동생은 종종 길에서 고양이나 다친 새들을 주워 오곤 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돌아올 때가 한참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늦장을 부리던 동생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사무실에 찾아온 여학생마냥 상자 하나였다. 그 안엔 황금색 털을 자랑하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동물을 질색해하시던 아버지는 당장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으라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이미 우리 품에 들어온 생명을 다시 길바닥으로 내치는 건 차마 하지 못할 짓이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녀석을 키우기로 결정하였다. 아버지의 반대는 시간이 지나면 차차 무력해지리라 믿었다. 그 고양이는 그 해 약 일주일간을 우리 집에서 머물렀다.


건강하던 녀석은 어느 날부터인가 녀석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식욕은 뚝 떨어지고 재빠르던 몸놀림은 둔해졌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하루는 이미 일어나 있어야 할 시간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는 녀석을 결국 보다 못 했는지 어머니는 녀석을 데리고 동물병원에 방문했다. 그리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떨어졌다.


아마도 녀석은 우리 집에 오기 전부터 어딘가에서 머리를 크게 다쳤던 모양이었다. 의사는 때가 너무 늦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다만 고통을 줄여줄 수 있도록 진통제를 처방해주는 것이 유일한 조치였다. 결국 녀석은 우리 가족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진창처럼 지긋지긋 했고 녀석이 남모르게 감내 했을 고통에 눈물이 솟았다. 그래도 삶의 마지막을 우리의 곁에서 행복하게 보냈을 거야, 라며 자위하는 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녀석을 집 뒤의 동산에 묻어주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괴로운 표정으로 길에 침을 탁 뱉었다. 동물이라면 평소 질색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지내 온 정을 무시할 양반은 아니었다. 틈만 나면 아버지의 발 위에서 애교를 피우던 녀석이었다. 집안 최고 권력자에 대한 아부였는지 몰라도 아버지 옆에서 늘 찰싹 들러붙어 있곤 했던, 그런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애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슬픔은 사그라들고 허전한 일상에 적응하던 참이었다. 갑자기 동물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침 병원에서 새끼를 밴 길냥이 한 마리를 보호 중인데, 출산한다면 한 마리를 데려갈 의향이 있느냐고 묻는 전화였다. 아무래도 동물병원에서 죽어가던 녀석을 서글프게 지켜보던 우리 가족이 눈에 밝혔던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저녁의 식탁 위에서 그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특별히 별 말을 하지 않으셨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아는 법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 녀석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한 마리를 입양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달쯤 지났을까. 어머니는 이제 갓 어미 젖을 뗀 어린 고양이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오셨다. 우리는 녀석에게 ‘보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수컷치고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그 애가 우리에게 와준 것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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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8년이 흘렀다. 웅덩이를 이루다 못해 호수의 경계도 넘보는 시간의 양만큼 떠오르는 에피소드도 한 두 개가 아니다. 눈이 많이 오던 날, 녀석을 데리고 옥상으로 가던 날을 떠올린다. 태어나 처음으로 눈을 본 보리는 호기심에 한바탕 눈밭을 나뒹굴다가도 문득 그 한기에 놀랐는지, 아니면 낯선 장소에 있다는 것에 겁을 먹은 건지 부리나케 우리에게 달려와 집으로 가자며 성급하게 재촉했었다.


상자 안으로 자꾸만 들어가길 좋아하는 녀석이 귀여워 한 번은 쇼핑백에 녀석을 넣어놓고 복도 한 바퀴를 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집 안 전체를 소독하느라 한 달 정도 외갓집에 보리를 맡긴 적이 있었는데, 녀석에겐 그게 자신을 버렸다는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이후엔 산책을 나갈 때마다 두려워하며 칭얼거리는 녀석을 보며 마음이 씁쓸해한 적도 있었다.


쉬는 날이면 언제나 보리와 함께 혼곤한 낮잠에 들었다. 같이 자자는 내가 귀찮았는지, 금세 내 품을 뿌리치고 도망치다가도 잠시 후면 슬며시 다가와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눕는 녀석을 보며 부성애 비스무리한 감정을 느껴보기도 했었다. 중성화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뒤,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아 침대 위에 축 늘어진 녀석을 보면서는 괜한 안타까움에 눈시울이 붉어진 적도 있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함께 한 일상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일렁인다. 목욕을 시키던 일, 병원에 데려가던 일, 오랜만에 어미와 상봉시켰던 일,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주던 일 등등. 모든 기억이 내겐 소중하다. 나는 보리를 보며 그저 말 못하는 짐승이 아님을 배웠다. 보리를 보고, 다른 길냥이들을 통해서 세상이 약자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를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불어 산다는 것의 가능성과 희망을 배웠다. 내가 만약 이상주의자라면, 그 공로의 8할은 아마도 보리 덕분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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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방관들은 일정 기간을 주기로 근무지를 옮긴다. 마치 교사들이 이 학교, 저 학교로 발령이 나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한 번은 내가 이전에 근무했던 센터에서 함께 생활한 직원 한 분이 현재 내가 있는 곳으로 발령을 받아 오셨다. 나와는 제법 농담도 심심치 않게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 전 본부에서 내려온 나의 수방 진급 공문을 보더니 웃으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야, 니가 벌써 수방(병장)이냐? 어리바리가 그저께 아니었냐?’


그 물음에 왜 괜히 부끄러워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무도 모르게 간직하고 있던 비밀 하나를 들킨 마냥 얼굴이 달아올랐다.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까까머리의 어리버리한 이병에서 제법 농담도 함께 주고받을 정도로 여유로운 병장까지, 그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가까이서 내내 지켜본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변화 일부를 오롯이 지켜본 시선의 느낌이란 어떤 것일까.


과거의 ‘나’란 강 너머의 불구경마냥 모호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하물며 회상의 주체가 나일 때는 더더욱. 대신 우리는 타인의 과거를 통해서 흘러간 시간의 궤적들을 체감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의 입을 빌려 들은 나의 과거는 마치 파노라마마냥 생생하다. 지나간 시간이 나의 눈앞에서 일렁인다는 표현이 아마도 어울릴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를 통해서 나의 과거를 엿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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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보리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나의 머릿속엔 ‘보리’가 자라온 모든 순간들이 하나하나 선명하다. 보리의 시선엔 여드름투성이의 중학생이 성인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고, 입대를 하고, 전역을 앞둔 그 모든 시간의 낱장들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서로의 과거를 엿보며 지나간 시간을 체험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속 주인공은 병원의 실수로 바뀌어 버린 자신의 진짜 아들 대신에 이제껏 함께 살았던 남의 아들을 선택한다. 어쩌면 가족은 피가 진하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보내온 시간이 진하기 때문에 성립하는 이치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가족’이란 단어는 완성형 명사가 아니라 진행형 동명사임이 바람직하다. 그런 고로 나에게, 혹은 우리 가족에게 보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우리 식구다.


이제 나는 조금 먼 미래를 생각해본다. 다가오지 않은 서로의 모습을 짐작해보는 것이다. 20살이 된 이후로, 나는 줄곧 집을 떠나 있었다. 먼 곳의 대학을 다니느라, 그리고 군대에 와 있느라. 저번 휴가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보리의 얼굴을 힘주어 들여다보았다. 그 순진무구한 얼굴 속에서 나는 소방서의 새 식구를 함께 떠올렸다. 우리 보리도 그렇게 조그마할 때가 있었는데. 천진하기 짝이 없고 놀아달라며 맑은 목소리로 재촉하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의 우리 보리는 장난감엔 시큰둥하고 걸어오는 장난엔 귀찮기만 하다. 다만 유난히 짧은 고리를 휘적거리며 바닥을 굴러다닐 뿐이다. 문득 체감하는 시간의 어마어마한 양에 나는 서글퍼진다. 언젠가 이 사랑스러운 녀석과 이별을 해야 할 때가 틀림없이 올 것이다. 그 말은 곧 ‘한 시기의 나’와 이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긴 한숨이 잇새 사이로 쏟아졌다. 예고 없는 이별이야 가슴 아픈 줄 알았지만, 예고된 이별이 벌써부터 사람을 탄식에 젖어들게 할 줄은 몰랐다. 가망 없는 무의미한 물음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담담한 이별이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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