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7. (D-137)
추석을 맞이해 벌초를 하고자 아버지와 함께 오랜만에 시골로 왔다. 무더위와 작업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늦은 아침 식사를 하던 와중에 아버지께서 넌지시 말을 던지셨다. 여기까지 온 김에 할머니가 계신 납골원이나 가지 않겠냐고. 마침 어머니도 그곳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셨다. 묵묵히 밥을 씹어 넘기며, 나와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모르겠지만 작년부터 우리 가족에게 ‘추석’이라 함은 다가오는 외할머니의 기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벌써 2년이란 시간이 지나버렸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다시 찾아간 그곳은 여전히 고즈넉하다. 오고가는 차의 엔진음과 불어오는 바람만이 텅 빈 공간에 소리라는 것을 채워주었다. 곤한 잠에서 겨우 깨어나며 나는 차에서 내렸다. 옆자리에 주차된 할아버지의 차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신 모양이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더니 2층짜리 건물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오는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이모와 할아버지였다. 가만히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큰집의 사람들이 내게 그랬듯 그들도 나의 남은 날들과 안부를 물었다. 왠지 모르게 쑥스러움을 느끼며, 대답을 하다 보니 나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도 반가워서 그러지 않았을까.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의 무더운 날씨와 달리 서늘한 공기가 우리를 먼저 맞이했다. 아마도 에어컨 때문일 것이었다. 하지만 비단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이 곳은 떠나간 이들을 한데 모여 또 다른 공동체를 이루는, 지상에서 실현된 작은 천국이다. 천국은 본래 하늘의 사유지다. 그곳을 이루며 사는 이들에겐 체온이 없다. 그러니 이곳이 추운 것은 당연한 거였다.
우리 가족은 함께 할머니에게로 다가갔다.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앞에 자리한 그녀의 방은 건물 내부의 서늘한 온도에도 불구하고,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색색의 햇살에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그녀의 이름 밑에는 최근에 바꾼 듯한 처음 보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수 적은 편지도 그 옆에 나란히 함께 있었다. 허리를 굽혀 할아버지의 편지를 몇 글자 읽어보았다. 어머니는 나긋한 미소로 추억 속에서 생생한 당신의 어머니를 마주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소리 내어 할머니에게 말을 거셨다. 각자가 나름의 방법으로 할머니와 마주하는 풍경이었다.
우리의 인사는, 그러니까 나와 할머니의 인사는 언제나 침묵 속에서, 그러나 다정한 시선 속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생전의 활력과 임종 직전의 무기력이 모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이들의 죽음도 함께 떠올렸다. 이를테면 노인들의 죽음들을 말이다. 그들 모두, 내가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 이번엔 다른 방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젊은 관리인의 말마따나 지은 지 얼마 안 된 이곳은 텅 빈 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덕분에 할머니의 방은 넓은 공간의 제 1열에 위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에 다시 방문한 이곳의 많은 방들은 저마다 주인을 가졌다. 각각의 이름 밑에는 우리 가족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이들이 붙여놓은, 고인을 추억할 수 있는 물건들이 붙어 있었다. 사진이나 편지, 혹은 어린 아이가 접어놓은 것 같은 카네이션 같은 것들 말이다. 형태는 달랐지만 나는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들은 ‘이야기’였다. 쓰는 이의 그리움을 실어 나르는, 아주 슬픈 이야기.
어떤 부부는 불과 두 달을 터울로 서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 학교에도 들어가지 못한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젊은 엄마가 있는가 하면 요절한 아들을 그리워하는 노부모의 절절한 사연도 있었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21살이 되었을 한 소년은 영정사진으로나마 친구들과의 졸업사진에 남았다. 무수한 사연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나는 문득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소방서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 이 질문의 대답을 하루도 생각지 않은 날이 없었다. 불구가 될 누군가의 미래를 예감하면서,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화재로 집을 잃은 이재민의 절규를 들으면서. 나는 요즘도 (<말의 힘>에서 이미 이야기 했었던)그 가족의 남은 삶을 종종 생각한다. 차라리 사고로 죽은 거라면, 혹은 왕따의 피해자였다면 원망의 대상은 또렷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원망의 대상이 나의 사랑스런 아들이라면,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까. 혹은 말 몇 마디로 사랑하는 동생을 영영 떠나보내게 된 두 형이 지고 있는 죄책감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지난 8월에는 민간보트가 수중보에 걸려 있다는 신고를 받고 구조 활동에 나선 소방관 2명이 타던 보트가 전복되어 순직한 사고가 있었다. 애도의 뜻으로 전국의 모든 소방서는 조기를 계양했고, 소방관들은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달았다. 늘 그렇듯 각자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지면 직원들의 입술 끝에선 기다란 탄식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응급상황도 아니었는데’라며 애꿎은 하소연은 공중으로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 본서의 지휘관들은 각 센터를 돌아다니며 재발 방지를 위한 안전 교육을 실시했다. 이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애도하고, 최선을 다해 그들을 잊을 것이다. 추억과 그리움은 유가족과 옆에서 그들을 지켜 본 다른 이들의 몫으로 돌아갈 테니.
그 때마다 무신론자인 나는 신을 찾았다. 그런 식으로라도 알고 싶었다. 왜 하필 그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들은 ‘고통’을 받아야 하는 지. 정말 종교인들의 말마따나 이 모든 건 인간을 성장시키기 위한 신의 시련, 혹은 섭리인 걸까. 아니면 그건 그저 일어났을 뿐인데, 재수 없게도 하필이면 그 반경 안에 그들이 살고 있었던 것일까. 글쎄....... 아무도 그 질문의 대답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을 질문에 가망 없는 노력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자 모두가 가여워졌다. 어쩌면 철학자들이 말하던 인간 삶의 비극적인 속성이란 그러한 데에 있는 지도 몰랐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 속담이 그렇게 슬픈 말일 줄은 이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물론 본래 이 속담의 의미는 일이 이미 잘못된 후에는 손을 써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중대한 오류가 있다. 어떤 식으로든 간에 우리는 결국 소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둑이 와서 훔쳐가든, 벼락이라도 맞아서 멀쩡한 축사가 망가지든, 혹은 화재가 발생했든. 재앙은 느닷없음의 형태로 찾아와 우리의 대비를 비웃으며 고통을 남기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뒤늦게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이유는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월호의 유족들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고의 피해자들도,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도 모두 비슷한 이유였을 테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이 평범한 하루를 보내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생각과 힘으로 거리로 뛰쳐나와 며칠씩 단식을 하고 시위와 농성을 하며 울부짖는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고로 남은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들여다본 세상은 참으로 잔인한 곳이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없는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도 모자라, 남아있는 희망조차도 앗아가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가망 없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다.
대관절, 그들이 말하는 ‘희망’이란 과연 무엇일까.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