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명원 Aug 14. 2020

나, 놀기로 결심하다


   

  언니의 컴퓨터로 명함을 만들었었다.   명함에 넣을 직업따위는 없었으니, 그저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를 장난삼아 넣었다.   

 웃었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된 나의 명함을 갖고 싶었다.   이십년도 더 오래된 예전 이야기다.    


 그 이후 나는 명함을 가졌고, 명함을 가지고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면 길었는데 이제 그만 나는 , 놀기로 결심했다.      

 굳이 결심까지 하지 않아도 놀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된 것일 수도 있다.   물리적인 나이뿐 아니라 신체의 나이도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갱년기의 모든 증상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라 갑자기 비 오듯 땀이 쏟아지거나,  손가락 어깨 등 관절 여기저기가 아프고,  이명도 생겼다.

 나에게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세월이 오고, 겪지 않을 것 같았던 것들을 이렇게 겪기도 한다.   

 

 젊은 시절 어느 여배우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남자친구가 늦는다며 먼저 먹으라 했지만 혼자 밥을 먹기는 쑥스러워 굶으며 기다렸던 적이 있다고.   남자친구에게 화를 내었더니 그가 진지하게, 혼자 밥조차 먹을 수 없는 사람이 혼자 인생의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그 여배우는 늘 그 말을 생각했다고 했다.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혼자 할 수 없는 사람이 자기 인생을 제대로 살수는 없음을 깨닫고, 그는 누구보다 주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명함을 가지고 일을 하던,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그 여배우의 인터뷰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어쩌면 내 또래인 그녀도 이제 잊었을지 모르는 예전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스무 살 적 그녀가 들었다던 그 말은 내게도 오래도록 이정표였다.

 가족, 친구와 별개로 나 혼자여서 할 수 없는 건 없어야 한다 생각하며 살았다.   물론, 맘먹은 대로 다 되지는 않았지만 .    


 며칠전 또 다른 배우는 마흔이 넘은 소회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그는 마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고 살 나이.    

 오십이 넘은 내가 얼마 전부터 겨우 생각하기 시작한 것을, 그는 나이 마흔에 알았으니 그의 오십은 어떨 것인가 궁금해졌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를 전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 하지 않아도 알아서 이해해달라고 하는 것은 욕심이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조심스럽게, 상처주지 않고 살 나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동질감에 뒤이어 그가 나보다 열 살은 더 어리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몇해 전 먼저 일을 그만둔 친구는, 일을 그만두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 이제 뭐 할건데? “  혹은, ”배가 불렀구나! “ 라고 했다.

 친구는, “ 뭘 꼭 해야 해?  배 좀 부르면 안돼? 이 나이 먹어 뭘 안해도 되게 하려고, 나이 먹어서 배 좀 부르려고 여태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뭘 또 해야 하는 거야? ” 라고 했다.    


 올해 들어서면서부터는 늘.. 쉬고 싶다, 일 그만 하고 싶다, 출근하기 싫다 했다.   

 막상 일을 그만두려고 하니 사람 맘이 우습다.   진짜 그만 두어도 될까?   

 대학 졸업하기 직전부터 일을 했고, 일을 그만두고 완전히 놀았던 시기는  딸아이 만삭무렵부터 백일 즈음까지 몇 달이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서 굴러다니거나,  비수기에 한달쯤 여행을 한다거나 하는 것을 꿈꾸었다.   이제 그런 것들을 하려면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나는 이제 그만, 놀기로 결심했으니까.    


 그러나 한켠에선 또 다른맘이 있기도 하다.   막상 평생해온 일을 그만둔다고 생각했을 때의 걱정,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이다.    갑자기 나이가 엄청 많은 노인이 된 것같은 우울감도 없지 않다.    

 늘 젊을 수는 없고, 내게 오지 않을 세월이란 건 없다.

 살아있으므로 나이를 먹고, 늙는다.  오히려 매해 나이를 먹을 수 있다는 건 , 그러니 감사한 일이다.

 하루에 열가지 해내던 체력이 반으로 줄어도,  거울속의 나와 남이 보는 내가 점점 달라진다 해도 그 변화와 괴리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독인다.


 너는 안늙을 줄 아느냐. 그런 말따위는 소용없다.   

 이제 남에게 이야기하기보다 자신과 잘 지내는 게 더 중요한 나이인지 모른다.   내가 나에게 제일 좋은 친구가 되는 나이.    

 놀기로 결심한 나는, 제일먼저 나와 잘 지내보기로 다짐한다.

 - 남은 인생도 잘 부탁해. 

매거진의 이전글 잠이 늘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