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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n 10. 2021

여권을 만들었다

   

   여권 기한이 만료되었다고 외교부의 친절한 문자가 날아온 지 꽤 되었다. 쓰던 여권은 스탬프를 찍을 빈 페이지가 몇 장 안남을 정도로 애용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코로나 시국에 여권이 뭐 급할쏘냐 싶어서 갱신을 서두르지 않았다. 날이 부쩍 더워진 6월이 되어서야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여권을 갱신하기로 맘먹고 나섰다. 기온이 32도까지 올라간 날이었다.


   나는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셀카도 거의 찍지 않는다. 렌즈를 가득 채운 내 얼굴을 보면 부담스럽기도 하고, 잊고 있던 세월을 상기시켜주기도 해서 말이다. 게다가 증명사진이라는 것이 참 정직한 얼굴과 표정으로 찍는 것이다 보니 더더욱 부담스럽기 이를 데 없다. 


   예전 학원을 운영할 시절, 아이들은 학기 초마다 증명사진을 찍는 이야기였다. 

"수원역에 엄청 보정 잘해주는 사진관이 있어요. 싸고 굉장히 여러 장을 줘요." 

아이들은 보정 여부가 중요했다. 늘 모여서 수원역으로 증명사진을 찍으러 나갔다. 그리고는 한동안 만나면 서로 증명사진을 교환하기도 하고, 친구들 사진을 모아서 보여주기도 하였다. 친구가 많고 인기가 많을수록 모아진 증명사진도 많았으므로 아이들은 열심히 나눠주고, 또 받았다. 가끔 어떤 아이들은 내게도 자기 증명사진 한 장을 부끄럽게 내밀기도 했다. 

   

   그때 아이들에게 들었던 사진관에 갔다. 그 '보정'이 나도 심각하게 필요하다. 여권사진은 규정이 까다로워서 프로필 사진처럼 과한 보정은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래도 안 한 것보다는 낫겠지, 했다. 직원은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 보정 전의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다. 

"헉! 이, 이렇게 나오나요? " 

내가 놀라 물었더니 사진관 직원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아니에요, 이건 보정 전의 사진인데 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 보정을 해드릴 거예요. 음, 제가 보기엔 이 사진이 보정하면 가장 잘 나올 것 같아요." 

사진관의 젊은 직원은 싹싹하게 한 장을 골라 주었다. 날이면 날마다 사진 찍어 보정하는 게 직업인 사람의 눈만큼 정확한 게 있을 리 없다. 내 눈엔 모두 흉악하게 보이는 사진이지만, 끄덕끄덕했다.

"저어, 원판불변의 법칙인 건 아는데요... 그래도 최대한, 최대한 턱살도 좀 날려주시고 눈뜨고 볼 정도는 좀 만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내 말에 직원이 크게 웃었다. 


10분도 채 안되어 직원이 만들어준 나는, 실물보다 조금 갸름해진 얼굴로 사진 속에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맘에 드세요? " 

직원이 물었을 때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요! 여태 찍은 사진 중 제일 맘에 들어요! " 


   사진관을 나와서도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음, 이것이 소위 '뽀샵'의 힘이로군. 나의 두툼한 턱살과 얼굴의 잡티가 죄다 날아가다니. 화장도 제대로 안 하고 찍었건만 풀 메이컵 한듯한 비주얼이라니. 

흐뭇하게 사진을 들여다보다 문득 생각했다. 근데, 이거 가지고 여권 만들러 갔다가 퇴짜 맞는 것 아닐까. "과한 보정을 한 사진은 쓸 수 없어요!"라든지 "본인 맞으신가요? " 하는 말을 듣는 것 아닐까 혼자 웃었다. 그러나 다행히 모두가 보정 처리한 사진을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세상인지 별말 없었고, 드디어 나는 10년간 쓸 수 있는 여권을 받았다. 추가 요금을 내고 페이지 수도 48매로 발급받았다. 


   32도의 더운 햇살 아래 여권을 들고 집으로 걸어오며 생각한다. 새 여권은 언제부터 쓸 수 있을까. 과연 48매 페이지에 도장을 다 채울 수가 있을까. 아직 팬데믹은 그대로이다. 이것이 올 줄 몰랐듯이, 또 어떤 다른 것이 올지도 알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내 인생의 십 년, 그 십 년간 48매의 여권에 몇 개나 되는 도장을 찍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팬데믹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면서도 여권을 갱신한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처럼 계획을 세우고, 희망을 부풀리고, 꿈을 꾸는 나날들이 될 것은 분명하다.



*2021 경기히든작가 수상작품집 '수진씨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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