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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l 02. 2021

순한맛 페미니즘

페미니즘에 관한 글만큼 난감한 주제는 없다. 몇 번 필진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던 웹진의 이번 회차 주제는 페미니즘이라고 했다. 막막했다. 그 덕에 요 근래 이처럼 페미니즘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과연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몰두해보기도 했다. 내가 살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별로 생각해볼 일이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그 주제에 관심이 없었던 건가 싶기도 했다.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관심을 가질 만큼 불이익 내지는 불평등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일까. 그럴리는 없을 텐데 말이다.


딸 둘에 막둥이 아들을 얻어 "왜 아들딸 차별하느냐!"며 엄마에게 볼멘소리도 해보긴 했으나 그저 불평 수준이었다. 결혼한 이후에도 시댁과 얽힌 크고 작은 일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명절이며 대소사 챙기러 가야 할 시댁이 있는 며느리가 아니니 그도 크게 불만은 못 내놓겠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러 다니던 시기였다. 모집요강에는 분명 남녀불문이었다. 하지만 이력서를 들고 간 회사 담당자의 반응은 달랐다. "죄송한데 여자 직원은 뽑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력서를 필요 없고, 받지도 않겠다는 거였다.

담당자의 말에 오기가 돋았다. 왜 뽑지도 않을 여자사원인데 남녀불문 지원 가능하다고 명시했느냐고 하자 말을 얼버무렸다. 담당자의 책상 위에 가져간 이력서 봉투를 탁! 소리가 요란 나게 내려놓았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봤다. 내가 돌아서고 나면 봉투는 당연히 그대로 버려질 테고, 점심 식사자리에서 직원들끼리 모여 반찬거리나 될  행동인 것을 그때도 지금도 모르지는 않는다. 

페미니즘의 사전적 의미는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라고 한다.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던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며, 사회 분야에서 여성 권리와 주체성을 확장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이론 운동을 가리킨다"라는 설명도 있다.

가정에서 큰  차별을 겪어본 적 없었던 내가 처음 만난 성차별의 현장이 그때였다. 페미니즘이라면 지금도 늘 12시 30분 정각을 가리키는 자세인 나에게도 그날은 종종 떠오른다.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친구들에게 물었다. 첫 문장조차 어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궁여지책이기도 했고, 내 또래 친구들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들은 다양한 직업군이었다. 가정주부도 있었고, 사업체를 운영하는 이도 있었으며, 대기업의 관리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던진 한마디였는데 의외로 다양하지만 결국은 한 곳을 향하는 말들이 날아왔다. 


일생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던 친구는 시누이와 며느리에게 다른 기준을 적용하던 시어른들을 먼저 이야기했다. 

"큰며느리는 함께 살았고, 작은 며느리는 매주 인사드리러 오는 게 당연하던 시부모님이었어. 그런데 막상 시댁에 격주로 간다는 시누이에겐 뭐 그리 자주 가느냐며 한소리 하시더라." 하며 서운해했다. 신혼초 은행에서 예금 인출해오라시며 뒤에 대고 하신 말씀은 이랬다고 한다. "그 돈 찾아서 도망가면 안 된다."

못 사는 집 딸도 아니었던 며느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시어머니가 서운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했다. 막상 시집간 딸이 시댁에서 그런 소리를  들었더라면 어찌하셨을까 궁금해했다.


"어느 쪽으로든 극단의 치우침은 좋지 않은데, 무엇보다 전체를 보고 상대를 이해하는 사고가 필요하다고 봐."라고 이야기한 친구도 있었다. 그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피해나 이득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협함이 무섭다고 했다. 

과연 맞는 말이라고  하다가 문득, 이건 남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를 본 쪽 보다는 이득을 본 쪽이 아무래도 너그럽기 쉬우니 말이다. 하지만 굳이 이득과  피해로 구분 짓는 나 역시도 결국은 그런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못하구나 싶어 씁쓸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다 극단은 아니라고 생각해. 상대방이 볼 때가 문제 아닐까."라고 했던 친구도 있다. 

보는 이의 시각이 중요하다는 것도 맞는 의견이다. 참 애매하고 어려운 문제이지만, 결국 보는 사람의 시각만이 문제겠나 싶기도 하다. 그럼 보여주는 사람은, 보는 (혹은 봐주는) 사람의 시각에서 먼저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그 또한 억울한 일 아닐까. 


"남들이 보기에 극단이라도 자기 생각에는 정상인 경우가 많지. 공감이라든지, 경청이라든지, 사회생활에 필요한 학습이 중요한데 그걸 모르는 건지, 알고도 무시하는 건지. 혼자 살아야 할 사람이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분탕질 일으키는 게 무서워."라고 의견을 준 친구도 있다.

누구나 입장이 다르므로  그 시각차라는 게 당연하긴 한데, 가끔 불편함을 넘어서서 섬뜩하기도 하다는 말에는 일부분 공감되기도 했다.


결국 그날 페미니즘에 대한 우리들의 맺음말들은 이랬다.

 "아전인수보다는 역지사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1분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왜곡된 페미니즘이나 마초이즘으로 번지지 않을 것 같아. 그런데 이게 습관화되지 않으면 결코 쉽지 않을 듯해. 그러니 내 사고의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 않으면 남들 말에 휩쓸려 결국은 나를 잃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

나는 사실 '페미니즘을 외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페미니즘뿐 아니라 무엇이든  외치는 것에 약간의 거부감을 갖는 축이다. 외치기 이전에 생활에서, 행동으로 소소하게 실천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반론이 없을 리 없다. 오죽하면 외치겠느냐 할 수도 있겠다. 외치는 것이 갖는 나름의 의미와 효용을 모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세상엔 외치는 '매운맛 페미니즘'도 필요하지만 표 나지 않게 소소하지만 시작의 발걸음이 될 '순한맛 페미니즘'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다는 처음부터 바다는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 2w 매거진 13호에 함께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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