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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l 03. 2021

평일 오후네시 반

 전자책은 방만한 자세로도 잘 읽히는데, 이상하게 종이책은 하던 대로 책상에 앉아 읽어야 제대로 읽힌다. 책을 모두 정리한 후로는 집에 쌓아두지 않고 주로 도서관에서 대출을 한다. 그 외 독립 서적이나 도서관에 없는 전자책은 사서 읽는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로 도서관의 좌석수도 줄었기에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 재미를 들인 곳이 스터디 카페이다. 조용하고, 쾌적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쯤은 이른 점심을 먹고 나서 두세 권의 책을 싸들고 간다. 모두 읽고 나서는 도서관에 들러 모두 반납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책을 반납하고 잠시 딸아이의 학원에 들렀다. 오랜 세월 나의 일터였으나 이제 딸아이의 일터인 곳이다. 코앞에 s전자가 있고, 대단지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상가지역 안에 학원이 있다. 음식점, 술집과 함께 학원가가 형성된 곳이다. 

 술집들이 영업을 시작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저녁 영업을 준비하는 식당에선 음식 냄새가 사방으로 풍겨 나온다. 이른 모임을 하려는 사람들이 식당을 기웃대는 발걸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다. 깔깔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숨이 넘어가게 웃는다. 학원을 가는 아이들 손에는 단어장이 들려있다. 아마도 영어학원에서 단어시험을 보겠지. 벼락치기로 단어를 외우는 게 분명하다.


 중고등학생 하교 시간에 맞추어 수업은 주로 5시부터 시작했었다. 일터가 집에서 가까웠으므로 느린 발걸음으로 걸어서 출근하는 길은 늘 평일 네시 반쯤, 딱  이 시간이었다. 어느 날은 출근하다 말고 방금 문을 연 술집에 들어가 앉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또 어느 날은 단골 커피집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테이크 아웃해서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기기도 했다. 햇살이 너무 좋은 날은 햇살이 너무 좋아 출근하기 싫기도 했었다.


 올해 들어서부터 내 평일 오후 네시 반의 풍경이 달라졌다. 내가 요즘 평일 오후 네시 반에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잠시 생각해봤다. 어느 날은 zoom으로  평소 듣고 싶었던 강의를 듣는다. 또 어느 날은 가로수 그늘 아래 동네를 걸었다. 그런가 하면 조용한 스터디 카페나 도서관에서 책장을 넘기기도 한다.


 모든 것이 느리게, 천천히 흐르는 것 같은 나날이 지나고 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흐르는 물은 수면 가까이와 깊은 곳의 물살 속도가 다르다. 그처럼, 아무 일 없이 흐르는 것 같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시간의 속도가 바뀌곤 한다. 가끔은 오후 네시 반의 출근하던 발걸음이 그립기도 하다. 햇살이 너무 좋은 날은 그 출근길의 한때가 떠오르기도 한다. 오늘의 오후 네시 반이 만족스럽다고 해서, 어제의 오후 네시 반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모든 것이 아직 익숙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모두 낯설기도 하다. 불과 반년 전인데 오래 전인 것도 같고 , 바로 지나온 어제쯤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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