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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l 14. 2021

알바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내 일터였던 학원 근처에 사셨다. 매일 두 분이 산책을 나오신 길에 커피 한잔씩을 사 가지고 들르셨다. 쉬는 시간에 사무실에 들어와 보면 수업하는 사이 놓고 가신 커피가 한잔씩 놓여있곤 하던 날들이었다.


'이제 그만 일을 하고 싶다 '라는 것이 첫째 이유였다. '돈이 벌리지 않아도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겠다."라는 것은 두 번째 이유였다. 그렇게 반년을 아예 출근하지 않는 삶으로 살았다. '은퇴'라는 게 엄청난 무엇일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별것 아니었다. 산티아고, 그 800킬로의 대장정이 끝난 이후엔 무언가 엄청난 변화가 있을 줄 알았으나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는 전에 읽은 책의 이야기 같았다. 

물론, 찾아보면 달라진 것이 없진 않다. 예전에 부모님이 그랬듯 나도 동네 산책을 매일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귀찮더니 이제 은근 중독성 있는 일과가 되었다. 낮에 느긋함을 티 내며 스터디 카페에 앉아 책도 읽는다. 일주일이면 두세 권을 읽기도 한다. 이 속도라면 다독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진짜 하고 싶었던 '쓰는 일'은 파도를 탄다. 어떨 때엔 참 열심히 쓰고, 또 어떨 때엔 며칠씩 한 줄도 안 쓰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마감에 맞춰 원고를 보내는 일 역시 늘 여유 있게 보내는 것은 아니어서 , 닥쳐서야 허겁지겁 메일을 보내기도 한다.


이렇게 은퇴, 혹은 자발적 백수, 아니면 새로운 일을 하는 사람으로 몇 달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내가 오래 해온 학원을 물려받아 잘 꾸리고 있는 딸아이의 전화였다.

"고 1 때까지 다닌 쌍둥이라는데, 올해 고3이라고 예전 선생님 아직도 수업하시는가 상담하고 싶대서 일단 번호는 받아뒀어."

잠시 망설였다. 지나간 인연을 기억해서 다시 연락을 준 고마움과 다시 수업을 해달라면 어쩌지 싶은 망설임이 한데 얽혔다. 통화를 하니 역시 삼각함수와 미적분을 수업받고 싶어 했다. 고3이니 계속할 필요 없이 몇 달만 수업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주 2회의 수업을 다시 잡았다.


부모님은 매일이다시피 학원에 들렀었다. 자주 오셨으므로 학원생들이 다 알고 "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곤 했다. 막상 나는 수업을 그만둔 이후 반년 간 거의 학원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내가 십몇년을 해오던 학원을 딸아이에게 물려주었다. 서류상으로만 딸아이가 원장이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의무와 책임, 그리고 권리까지도  오롯이 너의 것이 된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원장이 된 것에 딸아이가 기여한 바는 물론 없다. 하지만 이제 원장은 딸아이인 것이므로 나는 의도적으로 학원에 나가보지 않았다. 나에게 의지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관계없는 사람이 되었으므로 행여나 나가보았다가  한두 마디 거드는 일이 다른 의미의 참견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학원은 딸아이의 일터이지, 나의 일터는 더 이상 아니니 말이다.


몇 달 만에 학원에 출근을 한다. 그래 봐야 주 2회, 그것도 두 시간 반 잠깐일 뿐이지만 엄연히 출근이 다시 시작되었다. 반년 사이에 학원생 중 내가 모르는 얼굴들이 많아졌다. 오래 다니던 아이들은 그새 자란 데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나처럼 사람눈이 어두우면 아이들 알아보기 쉽지 않다. 그새 학원은 낯설었다. 크게 바뀐 것이 없어도, 이제 원장이 된 딸아이의 취향껏 구석구석 바뀌었으므로 어쩐지 남의 학원에 온듯한 기분이었다.

고3이 된 쌍둥이들은 여전히 밝고, 싹싹했다. 키가 훌쩍 더 컸고, 변함없이 둘이 꼭 붙어 다녔다. "그래, 여자 친구들은 잘 있고? "라는 내 말에 한 녀석은 "네! "라며 목소리가 컸고, 또 한 녀석은 " 며칠 전에 헤어졌어요" 했다. 나는 웃었다. " 가까이에 너 좋단 여학생이 또 있을 거야, 주변 잘 보고..." 했더니 손사래를 쳤다. " 헐, 저희 반 여자애들 몽땅 다 폭탄들이에요! "

이렇게 몇 달짜리 파트쌤으로 알바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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