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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Feb 21. 2023

작가피정 - 노시내

나는 이민은커녕 부모 대부터의 고향인 곳에서 대를 이어 계속 토박이로 살고 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도 아직 건재하며,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여전히 근처에 여럿 있어서 어느 날 갑자기 속칭 ‘번개모임’도 언제든 가능하다. 이런 내가 이민자의 삶과 그들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늘 어디론가 떠나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여행자와 생활자의 삶이 같을 수는 없으니 이민자들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한 채로 남아있다.     

저자는 일생 대부분을 외국에서 살아온 사람인듯했다. 러시아, 일본, 미국, 스위스, 파키스탄…. 그가 살아온 나라만 해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여러 나라에서 살아본 삶은 어떨까. 여행자로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삶 말이다. 이방인인 동시에 그들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삶이 궁금했다. 분명 그 나라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테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것이다.     


<오랜만에 마음 맞는 친구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컴컴해진 거리를 걸어 중앙역까지 아니카를 배웅했다전차에 태워 보내고 돌아오며 자칫 외로워질 수 있는 외국 땅에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친구 관계를 생각했다친구 관계도 다른 관계와 마찬가지로 가꾸고 돌보고 챙겨야 이어진다그리고 노력과 정성을 들일 만큼 그 관계가 가치 있다고 여겨야 이어진다만났을 때의 즐거움관심사의 공유세상을 바라보는 비슷한 관점 등도 중요하지만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선의와 진심이 가치 판단의 바탕이 된다외국에서 친구가 아쉽다고 그런 기준을 한 풀 꺾고 사람을 사귀다 보면결국 그 관계는 실패로 이어지더라는 것이 내 경험이기도 하다나이가 들어서 사귄 친구는 더더군다나 그러하다.

세상을 떠돌며 살다 보니 지인은 많아도 친구는 적다적어서 더욱 소중한 친구들 덕분에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기운을 얻는다. >     


한군데 머물러 산다고 해서 친구가 더 많거나, 친구 사귀기에 더 유리한 것만은 아니지만 외국에서 사는 경우 친구라는 관계 맺기가 좀 더 어려울 것 같다. 아무리 이메일이며 SNS가 흔해진 시대여도 얼굴을 보지 않고 주고받는 이야기, 그리고 모국의 언어가 아닌 타국의 언어로 예민한 감정까지 서로 나누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닐 테니까.

‘지인은 많아도 친구는 적다’라는 말에 참 공감했다. 나는 사실 지인조차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지인과 친구가 구분된다는 것에 공감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친구라고 말하는 사이에도 대부분은 지인의 범주에 놓게 되는 사람들도 많다. 누군가에게 친구가 되고, 누군가를 친구로 두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저자의 말처럼 ‘신뢰와 선의와 진심’을 갖고 서로를 친구로 둘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이다. 나 역시도 주위에 그런 친구가 있는지 생각하기 전에, 나는 그런 사람인지 먼저 돌아보게 되었다.     


<코로나 사태가 한창이던 2020년 6월 5빈첸초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모스크바와 취리히 구간 비행기가 멈춘 시기여서 우리는 모스크바에 발이 묶인 채 화상회의용 앱을 통해 장례식을 지켜보았다이후 취리히를 다시 방문했을 때 묘소를 찾았다거기에는 비행기 프로펠러 모형이 하나 놓여 있었다비행기 마니아였던 기계공 빈첸초를 기리는 물품이었다.

이민자는 한 명한 명이 다 이야기책이다.>     


코로나가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몇 년간 사람들은 가까운 곳으로도 떠나지 못했고, 떠나있던 곳에서는 돌아오지 못했다. 또한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홀로 떠나야 했고, 그렇게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지 못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엄혹한 시기였다.

저자도 시아버지의 장례를 앱을 통해서 지켜본 모양이다. 시아버지 역시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였다고 하는데 인생의 마지막엔 살던 나라의 언어도, 떠나온 나라의 언어도 잊은 모습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이민자에 관한 생각을 좀 더 깊이 해보게 되었다. 이민자는 한명 한명이 다 이야기책이라는 말이 와닿았다. 물론 그들의 삶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문장만큼은 어떤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한 이민자가 아니어도, 미국 변두리 식당 어딘가에서 일년내내 감자와 닭 껍질만 벗겼다는 이민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이민자에게 스며든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들의 어려움, 아픔, 힘듦이 왜 없겠는가. 물론, 그렇기에 그들의 성공 신화, 빛나는 지금이 마찬가지로 또 한편의 이야기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부스럭거리며 짐을 싸고 지퍼를 여닫는 소리가 불안을 증폭시킨다짐 가방의 지퍼 소리와 바퀴 구르는 소리가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매번 감정적으로 무언가를 건드린다그 소리엔 불안기대흥분외로움향수가 묻어 있다.

안정의 결핍을 고하는 소리정착되지 않은 삶을 상징하는 소리다그러나 그것은 새 출발을 허용하는 소리이며용기를 내라고 다그치는 소리이기도 하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두근거리는 순간은 캐리어에 짐을 싸는 순간이라고들 한다. 나 역시도 여행을 위해 캐리어나 배낭을 꺼내놓는 순간부터 신이 나고 기대가 부풀었다. 여행은, 다시 돌아올 것이기에 여행이다. 그 돌아올 날이 명확하기에 여행이다.

저자는 짐가방의 소리에 불안, 기대 흥분. 외로움. 향수가 묻어있다고 했다. 여행자에겐 불안, 기대. 흥분까지만 있지 않을까. 특히 향수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여행자는 돌아올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어딘가에서 머무르기 위해 떠나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안정의 결핍, 뿌리 없이 부유함의 상징. 새 출발의 신호. 용기를 주는 격려쯤으로 여기게 되는가 싶었다.      


<소유물에 관한 한 가능하면 욕심부리지 않고 간편하게 사는 것이 목표지만그렇다고 즐거움을 포기한 삶을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그래서 무엇을 갖기보다는 무엇을 하는 데 돈을 쓴다가족과 친지를 만나야 하니 비행기를 타는 데 돈을 쓴다탄소 발자국이 작지 않은 삶을 살지만그렇다고 부모님과 친구친척들을 안 보고 살 수는 없다건강하고 좋은 음식을 먹는 데 돈을 쓴다.

때로는 고급 식당에 가고 와인도 즐긴다공연을 보러 가고미술 전시장을 찾는다책은 여전히 사지만, 5~6년 전부터는 전자책과 오디오북의 비중이 슬금슬금 늘어나 장서가 차지하는 물리적인 공간은 더 늘어나지 않게 됐다.>     


그런 사람들에게 소유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구나 싶었던 문장들도 있었다. 욕심부리지 말고 간편하게, 최대한 물건을 늘리지 않고 사는 삶다웠다. 무엇을 갖기보다는 무엇을 하는데 돈을 쓴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공감했던 부분이 아닌가 싶다. 나는 어디론가 떠날 것도, 떠나온 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손에 쥐는 물건의 공허함은 어렴풋이 아는 나이가 되었다. 비싼 차, 좋은 옷, 멋진 가구, 넓은 집…. 그런 것들이 삶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소유하는데 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개인의 취향이므로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여행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듯이, 누군가는 좋은 옷을 사 입는 것을 생의 낙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나에겐 그렇지 않으므로, 나는 저자의 그 말이 와닿았다. 평소 내가 생각하던 것과 같아서 반가웠다. 좋은 옷도 언젠가는 벗어두어야 한다. 넓은 집도 언젠가는 놓고 나서야 한다. 비싼 차도 호호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상황이 와도 내가 잊지 않고 추억할 수 있는 시간에 투자하고 돈을 쓰겠다고 생각했다. 청춘이던 시절에는 와닿지 않았던 이런 말이 이제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나 역시도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나는 살아보지 못한,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보는 삶을 사는 저자의 글이어서 더 흥미가 있었고 와 닿는 부분도 많았다. 이민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인생은 모두 한 권이 이야기책일 것이다. 그러니 하루하루 부끄럽지 않은 한 페이지를 써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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