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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Apr 07. 2023

짧은 휴가 -오성윤

 “그날의 보성 풍경은 비단 외지인에게만 놀라운 게 아닌 듯했다. 마침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었기에 터미널까지 가는 콜택시를 불렀는데, 택시기사도 끊임없이 감탄을 했다. 이 지역의 겨울을 한두 해 본 사람이 아닐 텐데도 말이다. "눈이 많이 왔네요." "그쵸, 보성에서는 흔치 않은 일인데." 기사와 승객의 뻔한 대화가 끝난 후로도 그는 스치는 풍경에 연신 탄식을 뱉었고, 어느 순간에는 대뜸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잘 지내는가. 거기도 눈이 오는가. 여기는 눈이 정말 많이 내렸다. 봤다면 너도 깜짝 놀랐을 텐데. 언제 한번 안 내려오는가. 일이 바쁜가. 나야 운전하는 게 일인데 바쁠 게 뭐가 있겠는가....." 뭐 그런 이야기. 그리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혼자 감동에 휩싸여 있었다. 감동의 정체가 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살면서 그 순간을 계속계속 기억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거기는 눈이 오냐. 여기는 눈이 정말 많이 내렸다" 하는 말을, 아름다운 것을 마주하며 먼 곳의 누군가를 떠올리는 마음을.”  

  

삼십 페이지쯤을 읽었을 때 이미 나는 이 책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짧은 휴가’라는 오성윤 작가의 글이었는데 단언컨대 근래 읽은 여행기뿐 아니라 수필을 통틀어 이 책이 가장 좋았다. 작가는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여행한 곳들은 내가 가본 곳도, 들어본 적 없는 곳도 있었다. 늘 어디론가 떠나고, 대부분 내 나라 내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잠들고 깨는 일상은 어떤 것일까 잠깐 생각했다.

나 역시도 여행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처럼 오랫동안 전 세계의 이곳저곳을 다녀보는 경험은 해 보지 못했다. 그저 꿈으로만 남아있다.     


여행지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그 나라의 맛집, 교과서에서 봤던 유적지를 내 눈으로 보는 즐거움뿐일 리가 없다. 로마를 여행하고 돌아와 그곳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콜로세움이나 판테온에 떨어져 내리던 동그란 빛이 아니었다. 새벽 6시면 근처 성당에서 울려 퍼지던 종소리, 그리고 부슬부슬 비 오던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찾아 들어간 반지하의 비스트로 ‘앨리스’. 종소리에 이끌려 그 성당을 찾았는데 낮의 성당은 기억에 없고 여전히 그곳은 묵직하게 오랫동안 울려 퍼지던 종소리로 남아있다. 그리고 비스트로 ‘앨리스’, 그곳의 반지하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시는 동안 열어놓은 출입구 밖에 내리는 빗 풍경을 이따금 올려다봤었다. 그날 내리던 비, 투명한 병에 담겨나온 4분의 1짜리 와인. 내게 로마는 그런 것이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코로나의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는 중이 아닐까 싶은 요즘이다. 팬데믹이 시작되며 일상은 바람처럼 멀어졌는데, 다시 그 일상이 돌아오는 것은 참으로 더뎠다. 그래도 지난 삼 년을 보내고 이제 많은 사람이 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자유롭게 서로의 얼굴을 맞대는 나날이니 감사할 일이다.

모든 것이 이제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것일까 싶은 요즘은 그간 움츠렸던 많은 곳에서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다. 도서관에서는 책 모아 서비스라는 것을 시작한다고 했다.      


그것은 일종의 책 추천 서비스였다. 관심 분야를 신청해놓으면 매달 몇 권씩 자기가 신청한 분야의 책을 골라 대출해주는 것이다. 여행 분야를 선택한 나는 ‘남의 동네 탐험기’라는 여행기를 전자책으로 직접 내기도 했고, 같은 이름으로 시리즈를 계속 발행할 생각이어서 여행기, 특히 여행의 마음이 있는 여행에세이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여행 분야를 선택했더니 대부분은 가이드북 스타일의 여행기가 왔다. 받아온 몇 권을 뒤적이다 제일 아래 깔려있던 것이 바로 이 ‘짧은 휴가’였다.      


눈이 펑펑 내린 풍경을 보며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눈이 많이 왔다고, 언제 한번 오지 않겠느냐고, 네가 보았으면 깜짝 놀랐을 거라고 자기가 받은 감동을 전하는 마음. 아름다운 것을 마주하며 먼 곳의 누군가를 떠올리는 마음. 작가는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에게 작가가 말해주는 여행의 이야기들 역시 그렇게 다가왔다. 내가 가보았던 곳, 혹은 내가 가보지 못한 낯선 곳들, 그런 많은 곳을 다닌 작가는 그의 책 한 귀퉁이에 쓴 문장처럼 독자들에게 말하는 듯했다. 여기 너무 아름답다고, 언제 한번 오지 않겠느냐고, 당신이 보았으면 깜짝 놀랐을 거라고.      


여러 해 전 여행을 가면 엄마는 매일 전화를 했다. 해외에서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도 국내와 달리 비싼 요금을 물어야 하지만,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느긋하게 엄마 전화를 받았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으니 카톡을 할 줄 몰랐던 엄마에겐 전화가 빨랐다. 잘 다니고 있냐, 재미있냐, 조심해라. 늦잠 자다 비행기 놓치지 마라, 등등 하는 말은 늘 비슷했다. 나는 찍은 사진들을 엄마 이메일로 보냈다. 엄마는 이메일의 사진을 열어보고는 또 전화해서 이것저것을 묻기도 했다.     


펑펑 내린 눈을 보며 어딘가로 전화하는 택시 기사를 보고 감동에 휩싸였다고 하는 문장, 그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고 했던 이 책 속의 부분을 나 역시도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이제는 전할 수 없는 그 마음이 서글프기도 해서였다. 마음을 말로 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제 그럴 수는 없는 세월이다. 하지만 전할 수 없는 그 마음을 오래 기억하는 나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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