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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Nov 27. 2023

다정한 매일매일 - 백수린

    

작가는 음식을 만드는 일과 나누는 일, 그리고 음식이 남겨준 추억 같은 것들에 대해 제목처럼 다정하게 풀어놓았다.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졌는데, 나의 눈길을 오래 잡아둔 것은 여행에 관해 그녀가 이야기한 부분이었다. 여행의 추억이나 장면이 아닌, 여행 그 자체에 대한 묘사였는데 아마도 여행을 종종 떠나는 이에겐 정말 공감되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상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휴가가 삶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때로 진실을 괄호 안에 넣어두는 거짓말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부드러운 모래가 나른한 꿈처럼 펼쳐지고, 뜨거운 태양 아래 올리브가 익는 곳에서의 휴가를 닮은, 미혹으로 가득 찼지만 아름다운 거짓말이. 하지만 여름의 끝을 알리는 폭우마저 그치고 나면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트렁크를 창고 깊숙이 넣어두어야만 한다. 틀림없이 쓸쓸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일이지만, 계절은 바뀌고, 괄호 안에 넣어두었던 것들과 대면해야 하는 시간은 우리를 어김없이 찾아오니까.>     


생각해보면 나에게도 여행은 비슷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현실을 마주하는 일이 늘 즐겁고 편안하기만 했을 리는 없다. 특히 한창 바쁜 시절에 떠났던 여행이 그랬다.

떠날 때는 꽤 과감한 마음으로 문밖을 나섰다. 에라 모르겠다, 다녀와서 생각해. 종종 이런 마음이었던 거다. 길게 시간을 낼 수 없는 일상이었으므로, 내 여행은 늘 짧았지만, 하루 이틀은 정말 홀가분하고 좋았다. 마치 돌아가지 않을 사람처럼, 마치 깨지 않을 꿈을 꾸는 사람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돌아올 때가 가까워져 오면 문득문득 정신이 드는 순간이 잦아졌다. 돌아가 해결해야 하는 일들, 또다시 시작되는 일상들을 마주할 현실이 다가왔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을 길게 낼 수 없으면서도 나는 멀리 가는 여행이 더 좋았다. 지인들은 말했다. 그렇게 멀리 가서 짧게 보고 오면 아깝지 않으냐고

하지만 나는 멀리 가서 짧게라도 꼭 보고 싶은 것들이 있으니 떠난 여행이긴 하지만, 그 못지않게 돌아올 때 비행기를 오래 타는 게 좋았다. 뭔가 현실로 돌아올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좀 더 여유가 있었달까.     


멀리 간다는 이유로 어딘가로 떠나는 걸 좋아하는 건, 비단 비행기를 타고 가는 해외여행만의 일은 아니었다. 플라이낚시라는 취미를 가진 지 올해로 17년 차의 낚시꾼이기도 한 나는, 가끔 사람들의 호기심이 어린 질문을 받는다. 집에서도 먼 강원도 계곡에나 가야 할 수 있는 플라이낚시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냐고.

그저 좋았을 뿐 나 역시 명쾌하게 댈 이유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 그 플라이낚시를 여태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멀리 갔다 돌아온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플라이낚시를 할 수 있는 계곡이 집에서 편도 두세 시간을 운전해 가야 하는 강원도가 아니라, 집 근처 원천리천쯤이었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자주, 오래 먼 곳으로 떠났다 돌아오는 플라이낚시를 했을까.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출퇴근으로 바빴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몸이 편해지고, 시간의 여유가 많아졌다. 하지만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지금이라고 해서 괄호에 넣어두고 싶은 삶의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여전히 괄호에 넣어버리고 싶은 시간은 있게 마련이고, 그게 삶이고 인생이라는 건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 트렁크를 꺼내어 훌쩍 도망가고 싶은 날들이라면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종종 있을 것이 분명하다.     


트렁크는 여행자의 것이며, 머물러 사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창고 속에 트렁크를 넣어두고 저마다의 일상을 산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언제든 호기롭게 떠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창고 안에 내 트렁크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든든하기도 하다. 일상의 무거운 날들을 채워 떠난 곳에서 트렁크를 활짝 열고, 돌아올 땐 그 안에 여행지의 가벼운 공기를 가득 채워오는 어느 날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돌아오니 여행이고, 떠나야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러니 오늘도 내가 꿈꾸는 것은 이렇게 돌아오는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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