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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Aug 13. 2024

그들을 만나는 거리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거리를 걷는 뉴요커들. 그리고 멋진 구도 속 한 컷으로 남은 화보 같은 뉴욕풍경. 그런 것들은 내가 뉴욕에 대해 가져온 일종의 환상이었다. 그래서인지 뉴욕은, 그중에서도 일주일 내내 머물렀던 맨해튼은 아무리 봐도 비현실적이었다. 킹콩이 타고 오르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란 말이지. 너나 할 것 없이 인증샷을 찍는다는 덤보란 말이지. 뉴욕에서 일주일이란 짧은 시간을 머무는 내내 그런 마음이었다.      


뉴욕의 메트로는 악명높다. 지저분하고, 범죄자도 많다더라. 들리는 말은 대부분이 부정적인 평가들이었다. 그래도 막상 맨해튼 시내에서 차 없는 여행자가 이용하는 대중교통이라면 메트로가 1순위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첫날 메트로 입구를 본 나는 빠르게 포기했다. 지금이야 남 보기 멀쩡하게 이곳저곳을 잘 여행 다니는 것 같지만 사실 나의 왼쪽 무릎엔 한 뼘 가까운 긴 흉터가 있고, 슬개골 속엔 작은 나사와 와이어도 숨어있다.      


도서관 앞에서 맥없이 넘어져 무릎뼈 골절로 수술을 받았던 건 작년 3월이었다. 실밥만 풀고 나면 날아다닐 것 같은 기분과는 달리 수술하고 한동안은 평소처럼 걷기도 쉽지 않았다. 절뚝거리는 느린 걸음으로는 신호가 바뀌기 전에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했다. 지하철역에선 에스컬레이터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없다면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승객이 타면 출발하기 바쁜 시내버스는 아예 엄두도 내지 않았다. 내가 다치고 교통약자가 되어보기 전엔 알 수 없던 많은 일이 그렇게 내게 찾아왔다.     


일 년이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뛰지 못한다. 한 층 정도의 계단이라면 어찌 오르지만 두 층 이상의 계단 오르기는 아예 시도하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가는 일은 더 큰 난제이다. 

다치고 몇 달이 지나서 다시 여행을 시작했을 때 가족들은 걱정했다. 다들 ‘다리’ 이야기를 먼저 했다. 나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더 커진 두려움과 여전히 남은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여행을 떠나기로 한 건, 반대로 그 부자유한 시간을 겪었기 때문에 생긴 용기 덕이었을 것이다.      


뉴욕에서 메트로를 보고 내 다리로는 저곳을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며 여행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바로 시내버스였다. 여행지에서 구글은 신적인 존재가 된다. 역시 구글의 정보를 따라 시내버스로 맨해튼의 구석구석을 오갔다. 메트로와 달리 좌석에 앉아서 창밖의 뉴욕을 보는 재미도 꽤 좋았고, 관광객보다는 현지인들이 더 많아 보이는 시내버스 안의 풍경을 보는 재미는 더욱 좋았다.     


시내버스 타기에 요령이 생기자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함께 따라왔다. 우리의 시내버스와는 같은 듯 달랐다. 아기엄마들은 유모차를 편 채로 시내버스에 탔다. 개들도 주인을 따라 제 발로 버스에 올랐다. 우리의 버스에도 휠체어 석은 있지만 한 번도 휠체어를 탄 승객을 본 적은 없는데 뉴욕에서는 하루에 한두 번은 휠체어를 탄 승객을 만났다. 휠체어 승객이 있으면 기사는 버스에 오를 수 있게 발판을 내려주고 일어나서 직접 휠체어를 고정해주었다. 서두르지도 눈치 주지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엄청 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에겐 그게 일인 듯 무심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길에서도 장애인을 많이 만났다. 더러는 관광객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현지인인듯했다. 처음엔 거리나 대중교통에서 그렇게 많은 장애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생각해보면 다른 나라보다 미국에 장애인이 많아서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와 달리 장애인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문화이기 때문 아닐까.     

나는 미국이란 나라를 선망하지도 꿈꾸지도 않는다. 그저 다른 여행지와 마찬가지로 궁금한 것이다. 영화 속의 배경이 된 멋진 건물들, 드라마에 나온 활기찬 거리. 그 모든 것이 다 좋았지만 의외로 내게 오래 남은 건 이처럼 뉴욕의 거리에서 만난 교통약자들의 모습이었다. 


유모차가 통로의 반을 차지하고 있어도 얼굴 찌푸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들 그저 옆으로 비켜 갔다. 휠체어 승객이 올라타고, 또 그 휠체어를 고정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조급한 얼굴을 하는 이도 없었다. 물론 유난히 친절하게 굴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은 무심한 듯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 느껴졌다.      

간혹, 저렇게 중증장애인인데 혼자 전동휠체어를 타고 번화가에 나오다니…. 싶은 사람도 만났다. 장애인의 권리 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느낀 것은 비장애인에게 자연스러운 외출이, 장애인에게도 자연스러운 환경이었다. 그들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우리에게는 생경하고 낯선 것이다. 


그처럼 내 눈에 유달리 장애인의 모습이 많이 들어왔던 건 나 역시 작년 이후 다리를 수술하고 아직 뛰지 못하는 교통약자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도저히 횡단보도 불이 바뀌기 전에 건널 수 없어 빨간불이 되고서도 절룩거리며 혼자 걸을 때 주춤주춤 앞으로 나오는 차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었다. 점멸신호가 들어오면 마음이 급해졌는데 누구 하나 옆에서 같이 걸어만 주어도 덜 민망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모두 나를 지나쳐 길을 건너갔다.


그런 날들의 기억이 남았고, 그 기억들은 내게 교통약자의 어려움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러니 감히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내버스에서 내린 전동휠체어 승객이 혼자 천천히 움직여 어딘가로 가는 것을, 그의 모습이 작아지고, 인파 속에 섞여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봤다. 내 나라에서도 이처럼 거리 어디서나 장애인을 많이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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