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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Aug 29. 2024

정전

                                   

역대급의 무더위라고, 관측 사상 최장기간의 열대야라고 방송에서 말했다. 더운 것도, 추운 것도 다 마뜩잖은 나지만 굳이 둘 중 더 싫은 것을 고르라면 역시 더위를 꼽겠다. 

특히나 뜨겁고도 뜨거운 올여름은 에어컨을 끄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요즘의 에어컨은 껐다 켰다 하는 것보다 계속 틀어두는 것이 오히려 전기 절약이라는 기사의 내용을 핑계 삼았다. 그 덕에 집안에선 그나마 살 것 같았지만, 환기를 위해 창을 열면 마치 사우나 속 공기처럼 밀려드는 뜨거움에 놀라 얼른 문을 닫곤 했다.     

가족들이 모두 퇴근해서 막 저녁을 준비하고 프라이팬을 달구던 참이었다. 

어엇! 

일순간에 집안의 조도가 확 낮아졌다. 아직은 해가 긴 여름 7시 반이니 집안은 빛이 한풀 꺾이고 살짝 어두컴컴했다. 놀라서 확인하니 집안의 모든 전기가 나갔다. 에어컨도, 선풍기도 멈추었다. 공유기도 꺼졌으므로 노트북의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전기 레인지를 쓰는 집이니 조리도 할 수 없었다.     

관리실에 확인 전화를 했더니 차단기를 확인하라는 말에 생전 열어본 적도 없는 그것을 열어봤다. 차단기가 떨어졌을 거라는 직원의 말과 달리 차단기는 어느 하나 내려가지 않은 상태였다. 전화를 끊고 그의 말대로 하나씩 실험해보았지만 내려가는 차단기는 없었다. 다시 전화했을 땐 계속 통화 중이었다.


“앞 동은 불이 들어와 있어.”

딸의 말에 아무래도 이상해서 현관문을 열었더니 마침 앞집 할머니가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계셨다. 

“아니, 우리 손주들이 집에 불이 안 들어온다고 전화가 와서 내가 급하게 왔는데….”

딸과 나는 의미심장하게 눈을 마주쳤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었어.     

1층에 내려가 보니 우리 동 모두가 정전된 것도 아니었다. 딱 우리 라인 32세대만 정전이 되었단 걸 알았다. 그리고 복도와 엘리베이터 등 공용공간의 전기는 실내와 다른 계통인지 이상 없인 복도 불이 들어와 있고, 엘리베이터도 멀쩡히 작동했다.


어둠에 잠긴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딸은 냉장고가 오래되어서 그렇다고, 당장 냉장고를 사야 한다고 타박을 해서 난 정말 우리 집만 전기가 나간 줄 알았어요.”

“왜 우리 라인만 이런 거예요? 푸닥거리라도 해야 하나.”

“아이 참, 3년 전에 기회가 왔을 때 이사갔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었어요.”     

저마다 한두 마디씩 하며 웃는 사이 해는 완전히 지고, 입추가 지나고 처서를 앞둔 여름밤의 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요 며칠 전부터는 좀 더위나 나아진 것 같아요. 한낮에는 마찬가진데 새벽이랑 저녁엔 어쩐지 다르거든요.”

“처서 지나면 이제 여름은 다 끝난 거예요. 더워 봐야 이제 얼마나 덥겠어요.”

“그나저나 전기는 대체 언제 들어오는 거예요.”     


어둠에 잠긴 우리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면 정전이란 것이 얼마 만인가 싶다. 어린 시절에도 정전의 기억은 거의 없다. 단지 그 비슷한 추억이라면 바로 ‘등화관제 훈련’이다. 그 시절엔 적의 공격에 대비해 민방위훈련뿐 아니라 가끔 등화관제 훈련을 했다. 온 집안의 불을 모두 끄고 어둠 속에서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우리 형제들은 참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랜턴을 가지고 장난치며 놀았다. 행여라도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이 있으면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000호 불 끄세요!     


졸지에 등화관제 훈련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더니 딸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1층에 모인 비슷한 연배의 주민들은 다들 웃었다. 어느새 등화관제 훈련도 낯선 세월이 되었고, 정전이란 것도 이렇게나 새삼스러운 요즘이다. 뉴스에서 간혹 여름철 전기수요폭증으로 어느 아파트가 정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을 떠올렸다. 역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해서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닌 거지만, 나만 피해서 가라는 법도 없는 것이 세상의 일이란 걸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다행히 한 시간쯤 지나 전기는 복구가 되었다. 집집마다 불이 들어오는 걸 보고 누군가 소리쳤다.

“어! 불 들어왔다!”

그 말에 다들 환호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빼곡히 올라탄 이웃들은 아래층부터 차례로 내리며 인사하고 들어갔다. 나 역시 9층에서 내리며 남은 이웃들에게 인사를 했다. 도어락의 숫자를 누르다 문득 생각했다. 이사 온 지 십 년인데 이처럼 많은 이웃을 본 것이 처음이구나. 생각이 그에 미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부터 켰다. 차가운 바람에 얼굴을 디밀고 열기를 식혔다. 아직 이렇게 덥지만, 이웃 어르신의 말씀대로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코앞이다. 어김없이 가을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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