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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Sep 16. 2024

추석

                                 추석     

이 목전이지만 명절의 기분은 없다. 사실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은 특별한 날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그렇지 않다. 그저 조금 긴 빨간 날일 뿐이기도 하고, 그래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계획을 짜는 날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나서봐야 길이 막힐 테니 동네에서 놀지 싶은 맘이 들기도 한다.     


명절에 대한 감흥이 점차 없어지는 것이 순전히 나이를 먹는 나 때문만은 아니라고 여기고 싶다. 올해도 경기가 최악이라고 여기저기서 말들 한다. 그래서일까. 선물을 주고받는 일도 줄었다. 그런데 긴 연휴를 맞아 여행 간다는 사람은 주변에 더러 있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명절의 모습이 바뀐다고 해야 맞는 것일까. 이제 차례를 지내는 집은 드문 세상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나 역시도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엄마는 늘 ‘제사는 지내지 마라’하고 말씀하셨다. 돌아가신 조부모님의 제사를 모시고 명절 차례를 지냈지만, 그건 엄마가 어르신들과 한 약속일뿐이라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고집을 부리고 살갑게 말을 듣는 딸이 아니었던 나는, 두 분이 돌아가신 후엔 말 잘 듣는 딸이 되었다. 제사를 모시지 말라는 엄마 말씀대로 기일이나 명절엔 성당에 연미사를 신청하는 걸로 대신한다.     


추석이 다가오지만 그 어디에서도 명절이 가깝구나, 라는 느낌이 없는 어느 날이었다. 남편의 거래처에서 택배를 보내왔다.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보내고, 확인한 다음에 택배 상자를 열었다. 딱 한 끼에 하나씩 꺼내 구워 먹으면 좋을 만큼 알차게 소포장 된 소고기였다. 그것을 꺼내어 냉장고에 넣으며 문득, 어린 시절의 명절이 떠올랐다.     


명절이 지금과는 달리 흥겹고 들썩거리던 시절이었고, 친정 아빠는 사방에 아는 사람 천지인 넓은 발을 가진 분이었다. 명절 즈음이면 우리는 늘 아빠가 가지고 오는 물건들을 풀어보며 신이 났었다. 우리에게 소용되는 것이 아닌 술이며, 건강식품 따위를 보고도 괜히 궁금해 열어보고 싶어 했다. 이것저것 뜯어보다가 간식거리나 아이들을 위한 종합선물 세트 같은 것이 들어오면 환호하며 난리였다. 아무 때라도 슈퍼마켓에 가면 살 수 있는 껌이며 과자들이 ‘종합선물 세트’라는 이름으로 담겨있으면 그것은 어쩐지 흔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어떤 것이 된 느낌이었다.     


알뜰한 엄마는 선물 받은 것 중 소용되지 않는 것이면 잘 놔두었다가 다른 곳에 포장만 바꿔 다시 선물하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걸 '재탕'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행여라도 포장을 거칠게 뜯어 재탕하지 못할까 봐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면, 아빠는 일부러 쫙 포장지를 뜯고는 우리에게 내밀며 씨익, 웃었다. 마저 뜯어봐라.      

그때 아빠의 뿌듯한 얼굴. 그건 가장의 얼굴이었고, 아버지의 얼굴이었고, 한창 왕성한 인생의 한시절을 통과하는 남성의 얼굴이기도 했다.

이제 아빠는 없다.

젊고 활기찼던 얼굴도, 늙고 병든 얼굴도…. 이제는 모두 없다.     


세대가 달라지면 기억하는 명절이 같을 리 없다. 내가 어린 시절엔 추석이면 차례를 지내는 것이 당연했다. 토란국을 끓였고, 송편을 먹었다. 번다한 집안은 아니었으나 일가친척들이 제사나 명절이면 모였다. 물론 다 좋기만 했을 리는 없다. 한 해에 몇 번 안보는 친척들은 반갑기도 했지만 더러는 큰소리가 나기도 하고, 불편한 순간도 없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추석은 이런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지금의 세대는 훗날 추석을 어떻게 기억할까. 나의 딸이 지금의 내 나이쯤 되어 추억하는 추석의 한 풍경은 어떤 것일까. 긴 연휴에 가족이 함께 걷던 낯선 도시의 어느 거리를 떠올릴까. 번역 앱을 들이밀어 읽을 수 없는 언어로 가득한 메뉴판을 들여다보다 시킨 요리를 나누던 한때를 떠올릴까. 

시간은 흐르고, 변하지 않는 것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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