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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Oct 01. 2024

귤쨈 탄생기

                                귤쨈 탄생기     

상자 속엔 시퍼런 귤이 가득 들어있었다. 분명 상품설명서엔 빛깔 고운 귤의 먹음직스러운 사진이 있었고, 리뷰는 찬양 일색이었다. 그래서 의심 없이 결제했건만 막상 배송되어온 귤의 상태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뭐지, 이게. 반품을 해야 하나, 아니면 업체에 항의를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다시 칭찬 일색의 리뷰들을 훑었다. 한 구매자의 리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시퍼런 귤이 와서 놀랐는데, 먹어보니 보기와 다르게 완전 꿀맛이더라고요.

그럼 그렇지, 하는 마음으로 하나를 집어 껍질을 까서 입에 넣었다. 하지만 나는 또 한 번 실망했다. 귤 맛이라면 새콤달콤한 것이다. 하지만 상자 속 귤은 그냥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맛도, 단맛도 없을 뿐 아니라 속껍질 또한 굉장히 두꺼워 마치 비닐을 질겅질겅 씹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무래도 판매자에게 항의해야겠다 싶어 전화했으나 몇 번의 시도에도 받지 않았다. 결국 나는 소심한 복수를 택했다. 좋아도, 나빠도, 맛있어도, 맛이 별로여도 제품리뷰라는 것을 거의 달아본 적 없는 나였다. 이런 내가 최악의 리뷰를 공개로 남겨야겠다 결심했다. 

별은 반 개만 줬다. 제목은 ‘최악의 귤입니다’라고 달았다. 그리고 ‘절대 구매하지 마세요.’라는 말로 끝맺음을 했다.      


이제 그다음이 문제였다. 이 맛없는 2킬로의 시퍼런 귤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검색에 들어갔다. 이 나라의 친절한 블로거들은 맛없는 귤로 잼, 청, 절임 등을 만들면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 어느 것도 만들어본 적이 없다. 그중 쉬워 보이는 건 역시 쨈이었다. 

   그래, 너로 정했다. 귤 잼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이 시퍼런 귤들아!     


폭풍 검색으로 귤 잼 만드는 법을 확인했다. 몇몇 블로거들의 방법은 대부분 대동소이했다. 맛없는 귤엔 레몬을 넣으면 맛이 좋아진다. 생각보다 설탕이 꽤 많이 들어가니 당도 조절을 해야 한다. 농도가 묽다 싶을 때 불을 끄고 식혀야지 안 그러면 식은 후 딱딱해지니 조심해야 한다. 대충 이런 말들이었다.

잼 만드는 일이 처음이었으므로 자신이 없어 귤 상자에서 반만 꺼내어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겉껍질을 모두 까고 알알이 떼어내는 일도 만만한 건 아니었는데 진짜 문제는 속껍질까지 벗기는 것이었다. 어차피 먹을 때도 안 벗기는데, 잼을 하면서 굳이 벗겨야 할까.      


귀찮은 일은 하나라도 줄이고 싶은 나는 다시 검색에 들어갔다. 몇몇 블로그들을 검색한 끝에 원하는 답을 찾아냈다. 속껍질을 벗기는 것이 부드럽지만 벗기지 않아도 끓이는 과정에서 풀어지니 식감이 나쁘지는 않다는 것. 오히려 식이섬유를 섭취할 수도 있으니 좋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검색이란 그렇다. 모르는 것을 찾아내려는 목적도 있지만, 내 생각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이다. 나는 속껍질을 벗기지 않아도 된다는 부분에서 내적 환호성을 질렀다.     


일대일로 설탕을 넣는다지만, 그럼 너무 설탕을 들이붓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엄마는 살아계실 적에 매해 청매실을 잔뜩 사다가 씻고, 꼭지를 따고, 커다란 유리 항아리에 설탕을 넣어 매실청을 담가주었다. 그때 엄마가 설탕을 붓는 걸 보고 놀라자빠질 뻔했는데 그만큼 넣지 않으면 제대로 발효가 되지 않아 오래 두고 먹을 수 없다고 하시던 기억이 났다. 아, 엄마가 있었다면 물었을 것이다. 이만큼? 이만큼만 넣으면 돼? 이제 물어볼 엄마는 내 곁에 없으니 검색하는 손가락만 바쁘다.      


생각보다 잼을 만드는 건 오래 걸렸다. 서너 시간쯤은 끓이고, 불 옆에 서서 눋지 않도록 저어주어야 했다. 잘못 산 귤들을 살려보겠다고 몇 시간 동안 들인 재료와 노력을 생각하면 과연 이것이 맞는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를 하는 기분이었지만 이미 귤은 설탕과 함께 냄비에서 끓고 있으니 어쨌거나 잼을 완성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 만에야 완성된 잼은 정말 맛있었다. 자기 자식 안 예쁜 부모는 없다고, 내가 만들었지만, 너무 잘 만들었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심지어 맛보길 주저하며 떨떠름해 하는 식구들에겐 밥 대신 식빵과 잼을 내놓았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며, 왜 메뉴 선택권을 주지 않는 거나 고 툴툴거리던 식구들 역시 생각보다 맛이 괜찮다는 평을 내놓았다.     


드디어 자신감이 생긴 나는 다음날, 나머지 반의 귤도 모두 잼으로 만들기로 했다. 빛깔 고운 첫 귤 잼이 두 배로 많아진다는 즐거움에 신이 났다. 이왕 시작한 거 제대로 예쁘게 담을 젬병도 6개나 구입하고, 모자란 설탕과 레몬도 더 준비했다. 그렇다. 점점 배보다 배꼽이 커지고 있었지만 귤 잼을 향한 나의 광기는 그 무엇으로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옛말에도 있다. 과유불급이다. 어쩌면 나는 첫날 반 상자의 귤 잼을 만드는 것에서 멈춰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설탕을 좀 더 넣어볼까. 조금만 더 끓여볼까. 이러다가 결국 두 번째 귤 잼은 실패하고 말았다. 설탕도, 졸이는 시간도 다소 과했는지 냉장고에서 식히고 나니 잼은 돌덩어리처럼 굳었다. 아, 나의 귤 잼.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던 나는 역시 검색의 노예. 이번에는 굳은 쨈을 살리는 방법을 검색했다. 필요한 것은 구해지고, 찾는 것은 얻어지는 것이 검색의 세계이다. 굳은 잼을 살리는 노하우를 알려주는 블로거가 있었다. 그는 새로 과일을 설탕과 함께 끓이다가 굳은 잼을 넣어 섞어주면 적당한 농도를 맞출 수 있다고 했다. 같은 종류의 과일이어도,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더 이상 시퍼런 귤은 남아있지 않지만, 다행히 식구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배가 몇 개 냉장고에 있는 걸 기억해냈다. 두 개를 꺼내어 껍질을 벗겨 잘게 썰고 설탕은 조금만 넣어 끓이다가 굳은 잼을 넣어 버무렸다. 딱딱하게 굳은 잼은 배와 함께 적당한 농도로 풀리고, 빛깔마저 고와졌다.      


다시 젬병과 밀폐용기에 귤 잼을 나눠 담았다. 못 먹고 버릴뻔했던 시퍼런 귤이 이렇게 잼이 되다니. 심지어 망한 잼도 이렇게 살아났다니. 자꾸 입가로 웃음이 새어 나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잼들을 냉장고에 모두 넣어놓고 들여다보며 혼자 흐뭇하게 웃었다. 그런데... 이걸 언제 다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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