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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9시간전

목적지는 코스탈워크

                        목적지는 코스탈워크          

여행경로를 짤 때의 나는 세세하게 도장깨기하듯 계획을 짜지는 않는다. 몇 군데를 동선별로 묶어두는 것, 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법을 검색하는 것까지가 나의 여행계획의 시작이며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시드니에선 당연히 오페라하우스가 가보고 싶은 1순위였고, 그다음에 궁금했던 곳이 코스탈워크였다.

코스탈워크는 쿠지비치부터 본다이 비치까지 이르는 대략 4~5km의 해안산책로이다. 그곳의 사진을 보고 나는 그만 마음을 홀딱 빼앗겨 버렸다. 차가 다니고, 인도로 구분된 정형화된 길이 아니라 절벽을 따라 바다를 보며 걷는 트레일이었는데 가보지 않고도 그 길의 바람이 느껴질 정도였다.     


센트럴역에서 트레인을 타고 본다이정션역에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본다이 비치부터 시작해 코스탈 워크 일부를 걸어볼 생각이었다. 본다이정션역에 내리자 구글은 내가 타고 가야 할 버스를 안내했다. 플랫폼 B에서 잠시 후 출발하는 버스를 타라는 안내대로 움직이다가 한국에서 온 카톡에 잠시 정신이 팔려 걸음을 멈추었다. 카톡 주고받기를 끝내고 나서 버스 플랫폼 앞에 들어섰을 땐 막 버스가 떠난 듯 기다리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다음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올라탔는데 그만 여기서 사건이 벌어진다.     

너무나 당연하게 나는 그 버스에 올라탔는데 구글이 알려주었던 버스는 이미 출발했고, 내가 탄 플랫폼에선 노선이 하나가 아닌 두 개가 출발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올라타려는 한 여성이 ‘본다이 비치 가느냐?’고 기사에게 물었을 때 기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다. 그걸 들으며 1초쯤 망설였다. 내려, 말아?

망설이는 그 잠깐 사이 버스는 이미 출발했다. 예정과는 달리 움직이는 이 상황에서 한국인의 촉이 발동했다. 같은 플랫폼에서 출발하고 번호도 380,381로 연속되어 있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 82번, 83번 버스처럼 일부 구간이 겹쳤다 흩어지는 형태가 아닐까. 에라 모르겠다. 있어 보자,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구글은 버스에 올라탄 내가 본다이 비치 쪽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려줬다. 하지만 근처에서 버스는 난데없이 지그재그로 회전을 거듭하더니 좁고 복닥거리는 주택가로 들어섰다. 휴양지 느낌의 꽃과 나무가 가득한 정원. 흰색으로 외벽을 칠해 햇살이 튕겨 나올 듯 화사한 주택들. 아기자기한 동네 골목길에 서프보드를 든 사람들이 지나가고, 개를 끌고 나온 사람, 레깅스를 입고 조깅을 하는 사람. 래시가드를 입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로 봐도 바다가 멀지 않다. 오르막을 오르던 버스는 교행도 힘들어 보이는 좁은 길에서 직각으로 우회전을 거듭하며 이제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때였다. 갑자기 내 눈앞에 새파란 바다가 나타났다. 마치 후룸라이드처럼 아래로 쏠린 경사로였다. 이대로 뛰어든다면 저 바다로 다이빙도 할 수 있겠구나 싶은 풍경을 보고 마음속의 내가 소리쳤다. 여기야! 여기서 내려야 해!      


바다는 가까이 있었고, 동시에 아득히 멀었다. 어딘지도 모르고 바다가 나타나자 다급히 내린 곳은 마침 타마라마 포인트였다. 버스를 제대로 탔더라면 나는 본다이 비치부터 이곳까지 걸을 셈이었다. 그러니 나는 버스를 잘못 탄 대신 목적지에서 거꾸로 시작점을 향해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쳐 오고 갔다. 일요일. 여름이 오는 시드니. 사람들은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고 뛰거나 걸었다. 간혹 웃통을 벗고 근육질의 몸을 뽐내며 달리는 이도 있고, 노부부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걷기도 했다. 누군가는 벤치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먼바다를 보고 있었다.     

코스탈워크는 걷기도, 뛰기도, 쉬기도 좋은 길이었다. 여행자의 눈에 저들은 어쩐지 우리보다 좀 더 여유 있는 삶을 살며 인생을 즐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에게 왜 일상이 없겠는가. 오후 3시면 많은 카페가 문을 닫아버려 당황스러웠지만 대신 그들은 그만큼 일찍 영업을 시작했다. 어디나 사는 일은 녹록지않고 일상이 늘 휴가와도 같은 삶은 쉽지 않다. 내가 오늘이 여행의 하루인 것처럼, 그들에게도 오늘은 휴일인 일요일 아니겠는가.     


코스탈워크를 걸어 본다이 비치에 도착했을 때 그 유명한 아이스버그를 보게 됐다. 바로 앞의 푸른 바다를 둔 수영장은 보는 것만으로도 청량했다. 시드니 여행을 준비할 때 이곳저곳에서 젊은이들은 그 수영장에서 수영하고 싶어 했다.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그것 역시 여행의 한 조각이다. 고작 일주일의 여행자로 떠나온 내가 매일 주립 도서관에 가서 한두 시간씩을 보내고 오는 것과 본다이 비치에 가서 굳이 바다도 아닌 수영장에 들어가고픈 마음은 어쩌면 같은 것이다.

예전의 나는 내가 옳다고 믿었다. 다른 이의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을 폄하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내가 더 이상 그런 우를 범하지 않는 현명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다른 이의 이해할 수 없는 취향 앞에서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이제쯤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마음먹어 보려고 하는 사람은 되었다.      


목적지로 가는 버스는 하나뿐이 아니다. 꼭 버스를 타고 가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구글은 내게 정확한 길 안내를 해주긴 하지만, 설령 내가 타야 할 버스를 놓쳤다고 할지라도 그 즉시 바로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구글은 어디까지나 내가 요구하는 순간의 정보만을 꺼내놓을 뿐이다. 이처럼 인생의 여러 순간에 나는 결정하는 사람이 된다.

좀 더 가자, 다음에 내리자. 이쪽으로 걷자. 다시 검색을 해야지.

매 순간 이처럼 선택의 연속이다. 일단 오늘은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 내일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한 칸 더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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