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에서 궁금했던 건 물론 오페라하우스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꼭 가봐야겠다고 맘먹었던 곳은 주립도서관이었다. 정식명칭은 뉴사우스웨일스 주립도서관. 언젠가 그 도서관의 아름다운 열람실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그 고풍스러운 열람실에 꼭 가보고 싶다고, 거기 앉아 하루를 보내고 싶다고 막연히 꿈을 꿨었다.
여행의 모습은 다양하다. 시간을 쪼개어 떠난 여행의 하루를 그저 도서관 열람실에서 보낸다니,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 하루가 여행의 전부가 될 만큼 충만한 시간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도서관 외부의 느낌부터 우리나라의 도서관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거대한 박물관 같은 웅장한 건물이 도서관이라니. 지난여름 뉴욕의 공립도서관에서도 느꼈던 부러움과 놀라움이다. 다만 그곳의 열람실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곳은 아무나 편하게 앉아 이용할 수 있다니 더욱더 매력적이었다. 물론 도서관이니 정숙은 기본이다.
열람실의 사람들은 다들 노트북을 쓰거나 책을 읽으며 저마다의 시간에 몰두하고 있었다. 열람실의 삼면을 채운 엄청난 장서들. 마치 영화 해리포터 속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멋진 서가는 3층 높이로 엄청난 층고를 자랑했다. 돔 형태로 이루어진 천정의 격자무늬 유리를 지나 햇살은 아래로 부드럽게 내려와 퍼졌다.
사람들은, 그리고 나 역시도 어딘가 낯선 곳에서 한달살이를 꿈꾼다. 낯설다는 것은 두려움이기도 하고 새로움이기도 하다. 내 자리를 떠나 낯선 어딘가에서 삶을 이어 나가는 일에 대해서라면 아마 장 그르니에의 ‘섬’에 묘사된 그 마음이 그대로일 것이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도 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인생에 지켜야 할 비밀 따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처럼 혼자 여행하는 일, 그리고 그 여행의 한순간을 잠시 멈추는 시간을 갖는 일 역시 그와 비슷한 감정일지 모른다.
시드니에서 나는 일주일간 머물 뿐이다. 만약 내가 이곳에서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 혹은 보름만이라도 있을 수 있다면 나는 이곳 도서관의 열람실에서 매일 두세 시간씩 똑같은 시간을 보내보고 싶다.
길을 찾느라 두리번거리지 않고, 낯선 풍경에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지도 않고, 아주 익숙한 걸음으로 도서관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다. 늘 같은 시간에, 바쁘지도 않은 일상적인 걸음걸이로 이곳에 도착하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을 것이다. 배낭을 열고 노트와 펜을 꺼내어 무언가 쓰는 하루를 보낼 것이다. 어제의 이야기는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의 이야기는 내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하루. 그런 며칠을 보내는 상상을 한다. 물론 지금 나는 시드니의 일주일짜리 여행자. 한순간이 아까운 나는 몇 줄 쓰다가 도서관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겨 두리번거린다. 다시 또 몇 자를 적고는 또다시 고개를 든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여행자인 것이다.
여행자에게 남은 날 동안 아직 가지 못한 해변도 가야 하고, 유칼립투스로 가득하다는 산에도 가야 한다. 아름다운 열람실 안엔 적당한 빛과 나지막한 소리들이 자리 잡고 있다. 처음엔 그저 도서관을 한번 보고 가야겠다는 마음이던 여행자는 이제 생각한다.
‘이것도 여행의 일부분이라면….’
결국, 산과 바다를 보는 사이 어디쯤의 시간에 꼭 이곳에 다시 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여행이란 낯선 곳에 내 인생의 부스러기를 흘리고 오는 걸음이라고 생각해 왔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때로는 빛나는 조약돌을 떨어뜨리고 올 때도 있을 것이고, 새가 바로 물어 가버릴 빵조각을 흘리고 오는 적도 없지 않을 것이다.
내 여행이 그랬다. 언제인가는 영 힘들기만 하고 재미없었던 적도 있고, 또 언제인가는 조금 더 머무르고 싶을 만큼 행복으로 가득하기도 했었다. 오늘 내가 남기고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분명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아낼 수 있는 반짝이는 조약돌이었을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