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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운틴을 가다

by 전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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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마운틴은 무려 5억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고대 원시림이다. 그 숲을 이루고 있는 건 대부분 유칼립투스라고 한다. 그 나무의 수액이 햇빛과 만나면 주변 대기가 푸르스름해지다 보니 산 전체가 푸른빛을 띠게 되어 블루마운틴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에코포인트에서 블루마운틴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또 유명한 세자매봉도 볼 수 있다는 말에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시드니의 센트럴역에서 기차를 두 시간 넘게 타고 가서, 카툼바 역에 내려 686번 버스를 탄다. 여기까지가 내가 구글에게 물어 알아낸 정보였다.


카툼바로 나를 데려다줄 기차는 한 시간에 한 대뿐이었다. 이른 아침, 우리의 서울역쯤 되는 센트럴역에 도착해 보니 아직 새벽의 푸른 빛이 감돌았다. 유칼립투스의 숲에 가면 이런 빛이려나, 생각하며 기차가 출발하길 기다렸다.

관광객 인증용 코알라 키링을 매달고, 나의 친구 에어팟도 대롱대롱 걸린 내 작은 백팩을 의자에 놓았다. 혼자 여행한다는 실감이 몰려왔다. 일행이 있었더라면 기차여행의 들뜬 마음으로 조잘조잘 떠드느라 바빴을지도 모르겠다. 그 또한 여행의 즐거움이다. 때로 자유로움이 좋고, 때로는 자유로움이 쓸쓸하기도 한 혼자여행자는 에어팟을 귀에 꽂았다.


창밖으로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높은 빌딩이 점차 사라지고, 단층 건물이 많아졌다. 그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시골로 가고 있구나.

달리는 기차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 목적지가 같아 보이는 여행객들이었다. 내 건너편 자리엔 유쾌한 네 명의 일행이 앉았는데 얼추 칠십 전후의 연배로 보이는 어른들이었다. 그들은 등산 배낭을 메고, 등산화를 갖추어 신었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 등산스틱을 짚고 있었다. 블루마운틴은 유명한 트레킹 코스이기도 하다고 하니 아마 저들은 함께 트레킹에 나선 걸음인 듯싶었다. 누구 한 사람이 말을 꺼내면 다 같이 반응하며 크게 웃곤 하더니 이내 잠이 들어 조용해졌다. 이른 기차를 타려고 그들도 새벽부터 서둘렀을 것이다. 나처럼.


카툼바 역에 도착하자 대부분의 사람이 내렸다. 모두 686번 버스를 타러 가지 않을까 했던 내 짐작과 달리 그들은 어디론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구글을 따라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늘 헷갈리는 것은 우리나라와 운전석이 반대라는 것이다. 길을 건널 때나 버스를 탈 때마다 자꾸 반대편을 먼저 봤다. 아니나 다를까. 방향이 헷갈리며 또 한 번의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이다.

버스 정류장엔 686G 번 버스가 서 있었다. 앞 유리에 ‘에코포인트’라고 쓰여 있기에 타려다 멈칫, 했다. 구글은 686번 버스를 타라고 했는데. 결국 어제 본다이 비치에서 버스를 잘못 탔던 일을 생각하며 이번엔 기사에게 ‘에코포인트를 가느냐?’고 먼저 물었다. 흔쾌히 ‘간다’라고 하는 그의 말에 안심하고 자리를 잡았다.

버스가 움직이고 정류장을 몇 개 지나면서부터 구글이 알려준 길과는 다른 길로 움직인다는 걸 알았다. 구글 지도는 그대로 686번 버스의 길을 안내하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하다. 또다시 망설였다. 그러다 어딘가에서 카툼바역 앞에서 타는 버스는 순환선이라는 글을 본 기억이 났고 기사가 에코포인트에 간다고 했으니 가겠지 싶어 대책 없이 느긋해졌다.


사실 그런 느긋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건 버스 창밖의 시골 풍경 때문이었다. 카툼바 시내 역시 작았지만, 몇 정거장만 벗어났을 뿐인데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아주 오래된 외국영화에 나오는 것 같은, 마치 놀이공원의 세트장 같은 시골집들. 긴 장화에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개를 산책시키는 아저씨. 마당에 나와 꽃나무를 손질하는 할머니.

동네는 소박했지만 따스해 보였고, 투박했지만 정겨운 분위기였다. 그 어떤 관광지처럼 볼거리가 넘치는 것도 아닌데, 나는 686G 버스를 타고 시골 마을을 지나며 잠시 잊었다. 내가 지금 그 유명한 블루마운틴을 가려 한다는 사실을.


다소 돌았지만 내게 정겨운 시간을 선사한 버스는 에코포인트 앞에 나를 내려줬다. 내려서자 차가운 산의 바람이 몰려왔다. 전망대로 다가갔을 때, 좀전의 시골 마을의 느낌과는 달리 놀랍게도 눈앞에 장대한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나라 산처럼 높게 솟은 모양이 아니라 이곳의 산은 아주 멀리까지 높낮이 없이 이어져 있었다. 도저히 산이나 숲, 이라는 한마디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장관이었다.

유칼립투스의 원시림. 5억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이런저런 설명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역시 그 장관 앞에선 무언가 떠올리기보다 잠시 잊는 편이 빠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느낌을 떠올리지 않고 그저 산을 바라보는 쪽을 택했다.


한동안 그렇게 블루마운틴을 바라본 후에야 근처의 유명한 세자매봉이 눈에 들어왔다. 늘 기이한 바위를 보면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 이야기는 전설이 된다. 사람들의 마음은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다를 게 없는듯하다. 가까이 보이는 세자매봉과 그 너머 끝없는 바다처럼 펼쳐진 유칼립투스의 산을 오래 봤다. 너무 넓고, 너무 장대한 자연 앞에선 오히려 눈앞의 풍경이 실제가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블루마운틴에서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다시 카툼바역으로 데려다줄 버스를 기다렸다. 이번엔 686번 버스다. 올 때와는 달리 외곽으로 돌지 않고 바로 역으로 향했다. 역무원도 보이지 않는 작은 역 카툼바에서 시드니의 센트럴 역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돌아가는 기차는 올 때와 똑같은 노선을 달렸다. 일정하게 흔들리며 기차는 나아갔다. 올 때와는 달리 느긋했다. 한번 지나온 길이고, 돌아가는 길이며, 심지어 목적지는 종점이다. 떠나는 길과 돌아가는 일의 마음이 이렇게나 다른 이유일 것이다.

이어폰을 꼈다. 세상 소리가 사라지고 풍경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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