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 고다아야
<먼저 수종을 확인하고, 나무의 형태를 살펴본 다음 유용한지 어떤지를 생각해보고, 더 나아가 그 부근을 둘러보면서 같은 수종의 나무 그루터기가 있는지 없는지 주의를 기울이면 들판에 혼자 남은 이유가 짐작될 것이다. 좋은 나무, 좋은 목재를 일부러 한 그루만 남겨둘 리는 없다. 베어내는 품삯조차 아까워할 정도로 인간의 생활은 궁핍하니 야산에 혼자 남은 나무에 대한 평가가 절로 명확해진다 할 수 있다. 인간의 처지에서 보면 쓸모없고 가치 없는 나무이지만, 나무의 입장에서는 불운과 고난 끝에 겨우 얻은 노후의 평안이라는 것이다. 부디 혼자 남은 나무를 보고 멋지다 하는 말로 끝내지 말고 좀 더 세심하게 봐주길 바란다고 했다. 몸에 사무치는, 홀로 서 있는 노목에 관한 이야기였다.>
일본작가인 고다 아야가 쓴 수필집 '나무'는 표지부터 무척이나 아름답다. 멀고 가까운 곳의 다양한 나무들을 찾아다니며 쓴 글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생각한 건 지난여름, 그 뜨겁고도 뜨겁던 다케오의 숲속에서 만난 녹나무였다.
다케오의 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저 단순한 무더위가 아니라 모든 것을 바삭하게 말려버릴듯한 기세의 뙤약볕이 온 도시에 가득했는데 그 햇볕 아래 있으면 드러난 팔과 다리가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그래서인지 한낮에는 거리를 걷는 사람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온천의 도시 다케오엔 여름이 아니라 겨울에 왔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목적은 온천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내가 보려던 것은 바로 3000년을 살아온 녹나무였다.
다케오역에서 그 녹나무를 찾아가는 길은 쉽기도, 어렵기도 하다. 걷기엔 태양의 기세가 너무나도 무섭고, 대중교통은 만만치않게 불편하니 차라리 택시가 낫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도 언덕 위 산길로 오르다 보니 마치 아주 한적한 야외로 나선 기분이 들었다. 다케오 신사 앞에서 내려준 택시 기사는 명함을 한 장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근처엔 노선버스도, 택시도 다니지 않는다. 특히나 다케오에선 지나가는 택시도 없으므로 명함의 번호로 전화해서 불러야 한다고 했다.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산속이라 조금 나으려나 했지만 신사로 오르는 길의 태양은 여전했고, 이래서야 3 천 년 된 녹나무를 보러 가기도 전에 길가에 뻗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언덕을 올라 갈림길에서 오른쪽은 다케오 신사, 그리고 왼쪽 대나무숲 속의 오솔길로 들어서면 3 천 년 된 녹나무가 있다는 표지판이 나왔다. 숲속 오솔길은 이때까지와는 확 달라졌다. 하늘을 가린 대나무들이 가득한 숲속엔 싱그러운 나무 향이 가득하고, 적당한 그늘 덕에 순식간에 기온이 몇 도쯤은 낮아진 느낌이었다. 대숲 사이로 간혹 바람이 불었다. 바람 속에 푸른 숲의 향기가 섞여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푸른 향기를 맡고 싶은 마음에 심호흡하며 걷다 보면 숲속 오솔길은 끝이 난다. 그 막다른 길의 언덕 위에, 내가 궁금해하던 3 천 년 된 녹나무가 서 있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위치덕인지 녹나무는 훨씬 더 기이해 보였다. 푸른 잎이 무성하지 않았다면 아마 죽은 나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굵은 밑동은 온통 울퉁불퉁한 데다가 나무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어 그 안에 두 사람쯤은 충분히 들어가 앉을 공간이 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녹나무의 파수꾼’의 배경이 되었다는 곳이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거대한 녹나무 구멍에 들어가 밤새 자기의 마음을 담는 ‘염원’을 한다. 피를 나눈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자기의 염원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말이다.
나는 숲길을 걸으며 녹나무에 염원하러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묘사한 부분을 생각했고, 거대한 녹나무에 자신의 마음을 담던 사람들처럼 나 역시도 무언가 마음을 담고 싶어졌다. 나무 앞에서 절로 숙연해졌다.
<한눈에 봐도 편백나무는 편백나무의, 삼나무는 삼나무의 자취를 남기고 수명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살아서 도움을 주던 시절의 탄력과 힘을 깨끗이 지우고, 마음 편한 듯 진정되어 있어서 천명을 다한다는 것이 이런 안식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안도감이나 아쉬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전혀 질척거리지 않는 질 좋은 감동이 있었다. 게다가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찍이 니시오카 형제가 제일 처음 가르쳐준 "나무는 살아 있다"에 대한 답답함이 해소되었다. 이치에 맞지는 않지만 수명을 다한 나 무를 보니 살아 있다는 느낌이 선명해졌다.>
작가 고다 아야는 수필집 ‘나무’에서 오래된, 혹은 베어진 나무들의 이야기를 하는데 특히 나무의 ‘두 번째 생’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인상깊었다. 땅속에 뿌리박고 선 나무가 첫 번째 생이라면, 베어진 그 나무로 기둥, 탁자, 선반 같은 것을 만들었을 때 베어진 그 나무는 두 번째 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나무는 많다. 당연하게도 나무라면 첫 번째 생의 나무를 생각해 왔다. 가구, 기둥 같은 것에 쓰인 나무를 보고 그것이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한다든가, 베어진 후에 또 다른 쓰임을 얻어 모습을 바꾸었을 뿐 여전한 ‘나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거의 없다. 베어진 후의 나무는 그저 ‘재료’였을 뿐이었다.
물론 베어져 무언가의 재료가 된 나무가 ‘두 번째 생’이라고 해서 그것이 죽음에 대한 위안이 되는 건 아니다. 어쩌면 나무의 두 번째 생은 나무의 것이 아니라 그 나무를 쓰는 사람의 것인지도 모른다. 땅속뿌리가 뽑히고, 톱질을 한 후 널빤지나 각목이 되어 나무는 멋진 탁자나 튼튼한 기둥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때에도 나무가 생명을 갖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책을 덮고 아름다운 표지를 다시 한번 손으로 쓸어보았다. 이 멋진 표지를 가진 책 역시 나무의 두 번째 생이다. 이 나무는 ‘멋진’ 두 번째의 생을 가졌다.
하지만 두 번째 생을 갖는 것이 나무만의 일일까. 어쩌면 사람도 두 번째 생을 갖는다. 생이 끝나고 난 후 누군가 떠난 이를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면, 역시 그때 사람도 두 번째의 생을 갖는 것이 아닐까. 비록 떠난 이는 자기의 두 번째 생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두 번째 생을 생각하며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같을 리가 없다. 좋은 나무가 좋은 재목이 된다. 사람의 인생도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