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의 도전

by 전명원


은퇴를 하고 나면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내 주변만 봐도 그렇다. 어떤 이는 운동광이라 할 정도로 운동에 뼈져 산다. 골프부터 시작해 온갖 종류의 운동을 한다. 또 어떤 이는 원없이 여행을 하겠다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거나 남미로 떠난다. 일에 매인 사람에게 그처럼 긴 휴가를 써야 하는 여행은 꿈이었을 테니까.

이제 ‘집’이라는 직장의 인턴 1주 차를 맞이하고 있는 남편에게도 몇십 년 만에 새로운 시간이 왔다. 나는 그에게 “놀아!”라고 말했다. 일생 길게 놀아보지 않은 사람에게 ‘잘 노는’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편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하다. 놀고 싶은 맘이 반, 놀아보지 않아 엄두가 안 나는 맘이 반. 대충 이런 상태인 것 같다.


“준비해 오던 자격증을 따려고 해.”

결국 남편이 선택한 건 자격증 공부였다. 사실 남편은 퇴직 전에 업무에 직접적인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나 도움이 될 만한 자격증을 공부해야겠다고 맘먹고 있던 차였다. 퇴직을 준비하며 망설이더니 그냥 맘먹은 김에 해보겠다고 한다. 이제 그 자격증을 따서 쓸 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나이는 지났지만, 한번 마음을 두었으니 해내고 싶다는 것이다.

그걸 뭐 하러…. 그냥 놀라니까!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어느새 나는 남편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야! 무를 썰겠다고 칼을 뽑았으면 무를 썰어야지.”


멀쩡한 집과 서재를 놔두고 나는 거의 매일 집 근처의 공유오피스에 간다. 그곳에서 글을 쓰고, 수강생들의 원고 피드백도 한다. 예약하여야 하는 번거로움만 빼면 무료로 쓸 수 있는 이런 공간은 너무나도 유용하다. 이런 멋진 공간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우리 집 인턴에게 소개했다.

이제 아침 9시면 인턴과 나는 사이좋은 친구처럼 배낭을 하나씩 메고 집에서 걸어 10여 분쯤 걸리는 공유오피스로 향한다. 배낭 안에는 노트북과 책, 그리고 텀블러와 요깃거리가 들었다. 9시부터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일을 하고, 공부를 한다. 중간에 가끔 쉬는 시간엔 휴게실에서 간식을 먹으며 소곤소곤 잡담을 나누다가 오후 4시가 되면 다시 배낭을 둘러메고 나란히 집을 향해 걷는다.


그간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나 혼자 보냈었다. 혼자 도서관에도 가고, 공유오피스도 갔다. 글쓰기 모임이나 에세이 수업을 하러 가는 일 외엔 누군가와 말하는 일 없이 낮시간을 자유롭게 보냈다. 그런데 이제 ‘집’에 인턴을 채용하고 나서 내 생활도 이렇게나 바뀌었다.

“아빠랑 하루 종일 함께 있는 기분은 어때?”

딸이 물었다.

“생각보다 심심하지 않고 좋아. 친구 하나랑 같이 다니는 느낌이야. ‘아직은’ 그래.”

애써 ‘아, 직, 은’이란 부분에 힘을 주었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가보지 않은 길은 아직 알 수 없으므로. 지금은 싸우지 않고 사이좋은 친구로 지내지만, 어느 순간 ‘절교야!’ 소리 지르며 싸울 수도 있으므로.


공유오피스에서 우리 집 인턴의 책상을 흘낏 보면 꽤 집중해서 공부하고 있다. 이어폰을 끼고 동영상강의도 열심히 듣는다. 뒤늦게 열심인 모습이 대견하기도, 어쩐지 짠하기도 하다.

“내가 진즉에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면 뭐가 되어도 됐을 거야. 그런데 이제는 너무 늦었네.”

여름의 오후는 한낮처럼 덥고 뜨겁다. 집을 향해 걸으며 남편이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집’이라는 직장의 사장님답게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을 때까지 모를 수도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안게 어디야. 열심히 해봐.”


농담처럼 웃었지만, 사실은 나 역시 공감한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은, 한두 계단 올라서서 다시 바라보면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열 계단쯤 올라서면 그때는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 것이다. 사는 일은, 나이가 드는 일은, 그리고 경험이 쌓이는 일은 이렇게 계단을 오르는 일과도 닿아있다.

이제 와 손에 쥐어봐야 쓸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자격증을 따보겠다고 공부하는 남편을 본다. 나름 치열하게 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좋은 취미 가지셨네요’라는 말을 듣고 상처받은 적도 있는 나의 글쓰기를 생각한다.

그 누가 뭐래도 우리는 지금 계단을 오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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