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자리를 부탁해

by 전명원


남편이 ‘집’이라는 새 직장에 인턴이 된 지 3주쯤 지났다. 남편이 출근하지 않는 일상엔 의외로 금방 적응이 되어서 마치 3년 전부터 이어온 시간인 듯 느껴지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인턴이 된 남편의 마음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어때, 은퇴하고 지내보는 소감이…?”

내가 물었을 때 담배에 막 불을 붙이던 남편은 말했다.

“반반이야.”

아마도 그것이 정답일 것이다. 더 이상 출근하지 않으니 회사에서의 스트레스가 없어 좋기도 하고, 동시에 ‘백수가 되었다’라는 힘 빠지는 느낌이 들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인턴이 된 남편의 일상은 꽤 규칙적이다. 쓸 일이 없겠지만 준비하던 자격증이니 마저 공부해 보겠다는 말을 반신반의했는데 의외로 진심이었다. 아침 9시면 근처 공유오피스에서 하루 종일 동영상을 보며 공부를 하고 오후 3시면 집에 온다. 1차 시험은 한 달도 남지 않았다며 집에 와서도 책상에 앉는다.

“진즉에 이렇게 공부했더라면 서울대 갔겠는데…? 우리가 만날 일은 없었겠어.”

나는 책상에 앉은 남편을 놀린다.


어느새 남편은 환갑을 넘겼고, 나 역시 50대 후반을 향해 가는 중이다. 글쓰기 모임이나 글쓰기 강의가 없는 날이면 나도 남편과 같은 공유오피스에서 일한다. 글을 쓴다.

함께 보내는 하루를 들은 딸이 말했다.

“오, 완전 캠퍼스 커플같은걸!”

웃음이 났다. 우리는 정말 캠퍼스 커플로 만났다. 물론 학교 다닐 때는 함께 앉아 공부하는 건설적인 커플은 아니었다. 우리가 도서관에 자주 갔던 건 돈이 들지 않는 데이트 코스였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맡은 일은 설거지와 그릇 정리다. 그 외에 가끔 세탁기를 돌리거나 세탁이 끝난 건조기를 돌리는 일을 부탁한다. 그런데 남편은 세탁기도, 선조기도 사용해 본 적이 없으니 쩔쩔맸다.

“자! 그대로 따라 해 보는 거야. 전원 버튼을 누른다. 불이 들어왔지? 메뉴가 많지만, 모를 땐 무조건 ‘표준’이야. 그러니까 ‘표준’에 다이얼을 맞춰. 그렇지. 이제 어떻게 해야겠어? 동작만 시키면 되는 거니까 ‘시작’ 버튼을 누르면 끝! 쉽지?”

어느 날은 세탁기 사용법을, 그다음 날은 건조기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접혀있는 강아지 배변 패드는 미리 여유분을 펼쳐놓고 써야 편하다는 것과 습한 날엔 화장실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한꺼번에 다 알려주었다간 기억을 다 하지 못할 것 같아 하루에 하나씩 알려주었다.


설거지를 하거나, 책상에 앉아 있는 남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오래전의 아빠가 떠올랐다. 술도, 사람도 좋아하던 아빠가 은퇴하고, 나이 들어가고, 병이 찾아오고, 결국 생을 마감하는 그 일련의 세월을 옆에서 보았다. 친구도, 술도 함께 늙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늘 무료해하던 아빠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 나이의 남자들에게 은퇴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가사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아빠도 끝내 집안일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었다.

나의 남편 역시 가사 분담에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다. 가끔 설거지 정도를 했고, 쉬는 날이면 마지못해 청소기를 한두 번 돌렸을 뿐이다.


이제 남편에게 이런저런 가전제품의 사용법을 알려주었다고 해서 모든 살림을 다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자신이 담당하기로 한 설거지와 그릇 정리 외의 일들은 내가 ‘부탁’할 때 한다. 나는 일부러 “세탁기 좀 돌려줘.”라고, 말한다. “건조기 돌리는 것 좀 부탁해”라고, 한다. 물론 부탁이라 말하고, 내심은 지시란 것을 알지만, 그래도 말은 그렇게 해야 한다. 일생을 밖이 일상이었던 사람에 대한 배려이며, 함께 수십 년을 살아온 의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에게도 돌아온 집에 자기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자리란 곧, 나의 할 일이다. 집안일의 많은 것 중 설거지를 하는 남편. 세탁기와 건조기의 사용법을 알게 된 남편. 나는 그게 남편에게 새로운 ‘자리’를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이 믿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어서 과연 남편도 그렇게 생각할지 묻는다면 자신이 없어진다. 그렇기에 오늘도 외줄 타기를 하는 것이다. 무심하게, 때로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것 좀 부탁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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