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성산포'로 이생진 시인을 기억한다. 좀 더 정확히는 내게 "<그리운 성산포> 시집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던 Y를 기억한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건 1987년이었다. 그렇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부침 많고 여러 가지 굵직한 사건들로 큰 의미를 갖는 해를 몇 가지 꼽는다면 아마 1987년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 소용돌이 같던 해에 나는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최루탄이 날아다니거나 툭하면 휴강이던 그 시절에도 나는 철없는 신입생이었다. 같은 과의 친구들도 조금씩 사귀기 시작했는데 그때 Y는 같은 학번이지만 무려 세 살이나 더 나이가 많았던 언니. 가뜩이나 낯을 가리는 나는 Y가 어려웠다. 오가며 인사 외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눠본 일도 없었다.
그나마 Y는 학기 초에 잠깐 외엔 곧 강의실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주로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데모 선봉대에서 소리를 지르던 먼발치의 모습만 익숙하다. 운동권 학생들이 모이는 동아리에서 늘 시간을 보내는 Y는 그렇게 어렵기만 한 같은 과, 같은 동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 어느 날 오랜만에 강의실에 들어와 앉았던 Y가 불쑥 내게 물었다.
"너 혹시 '그리운 성산포' 시집 가지고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때까지 그런 시집의 존재조차 몰랐다. 이생진 시인이라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신이 났던 나는 그때까지 읽어보지 않았던 낯선 책들만 골라 읽고 있었는데 그즈음 빠져있던 것은, 장 그르니에거나 카프카였다. 이해하기 힘들었던 카프카는 이내 포기했지만 장 그르니에만큼은 오래도록 찾아 읽었다. 낯선 작가들의 낯선 책들에 빠져 살았지만, Y가 말한 책을 알지 못했던 나는 머쓱하게 도리질을 쳤고, 그런 내게 Y는 말했다.
"너라면 어쩐지 가지고 있을 것 같아서, 빌려보려고 했어."
그게 학교를 함께 다니는 동안 Y와 나눈 처음이며, 유일한 대화였다. 그녀는 학교를 중퇴했고, 나는 뒤늦게 <그리운 성산포> 시집을 찾아 읽었다. 그때까지 가본 적 없는 제주도가, 성산포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시라는 것도, 글이라는 것도 성큼 내 앞으로 왔다.
얼마 전 모인 동창 모임에서 Y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몇이 최근까지의 소식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모르지만, 얼마 전까지 시민단체에서 계속 일했다는 것. 여전히 재학시절에 함께 했던 운동권 동지들과는 연락을 잇고 있다는 것.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어느 누군가 올린 피드에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의 일부분이 있었다. 섬의 무덤에 관한 부분이었다. 섬에선 어느 곳이나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무덤이 있다는 문장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어서였을까.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생진 시인의 산문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를 만났을 때 망설임 없이 잡았다. 그런데 그 책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시인의 그 문장이 아니라 Y였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그런 순간도 있는 법이다.
접점이라고는 전혀 없던 순간에 잠깐 교차해서 점 하나가 만들어지는 순간.
점이 꼭 모여서 꼭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수많은 점은 그대로 흩어져있어도 괜찮다. 점은 그래야 점이다. 어쩌면 사람들의 인연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 역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는 좋았다.
누군가는 이렇게 쓰기 위해 치열하게 살고, 살아있는 동안 치열하게 쓴다.
하지만 아무 일 없이 살아내는 하루라고 해서 치열하지 않은 건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