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다낭시래.” 하는 이유로 그간 다낭을 여행지 목록에 넣기를 주저해 왔던 어느 날, 뜬금없이 “경기도 다낭시래.”라는 이유로 그곳이 궁금해졌다. 궁금한 것이 생겼다면, 당연히 가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순서이므로 얼마 후 나는 다낭으로 향하는 밤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리 루트를 짜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다낭의 볼거리라는 건 크게 없었다. 그렇기에 내내 궁금했던 건 ‘왜 경기도 다낭시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저렴한 물가라면 베트남에서 다낭만 그런 것은 아니다. 거대한 손이 다리를 받치고 있는 골든브릿지나 다낭 비치 말고도 그곳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미식일 것이라는 생각에 검색을 했다. 역시 사람들은 대부분 다낭의 음식을 말하고 있었다. 특히 반미나 미꽝, 반쎄오, 분짜 등 다녀온 이들이 두 번 세 번 추천한다는 음식들이 많았다. 나 역시도 그 목록 중 특히 ‘반쎄오’에 기대가 컸다.
다낭의 유명하다는 음식점 중 특히 반쎄오의 평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베트남 요리 중 하나인 반쎄오는 쌀가루를 얇게 크레이프처럼 부친 후 라이스 페이퍼, 채소, 각종 해산물 등과 함께 싸 먹는 음식이라는 말처럼 얼마 후 커다란 쟁반에 하나 가득 요리가 담겨 나왔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대하고 나니 난감했다. 쌈을 싸 먹는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스프링 롤처럼 작아서 젓가락으로 어찌 말아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음식에 직접 손을 대어 먹어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쌈은 어쩔 수 없이 손에 채소의 물기나, 음식의 양념이 묻기도 하는데 그것이 너무나 싫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깃집에서도 쌈을 거의 먹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빵 중에서도 고로케나 야채빵처럼 소스가 손에 묻는 것, 혹은 참기름이나 가루가 손에 묻는 떡 종류는 웬만해선 맨손으로 먹지 않는다. 포크든, 포장지의 일부든 이용해서 최대한 손을 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위생 관념이 철저한 깔끔쟁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사람이라 오늘 지워지지 않은 더러움은 내일 지우면 된다는 것이 나의 신조일 정도이다. 다만 나는 내 손에 음식물이 닿는 느낌이 싫고, 젓가락으로 손쉽게 입에 넣을 수 없는 그 귀찮음이 싫은 것이다.
기대한 반쎄오가 생각보다 커서 당황했기에 종업원에게 먹는 방법을 물어보니, 그는 어눌한 한국어로 순서를 알려주었다. 라이스 페이퍼위에 쌈 채소와 밀전병 같은 크레이프를 얹고, 갖은 고명을 맘껏 얹은 후 느억맘 소스를 뿌려 돌돌 말아 먹으면 된다고 했다. 손에 얹어 싸 먹으라고 설명해 준 종업원의 말과 달리 나는 그것들을 접시 위에 놓고 젓가락과 엄지, 그리고 검지 두 손가락만 이용해 대충 모양을 잡은 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손이 아닌 젓가락으로 요령을 부렸기에 쌈은 단단하게 싸지지 않았지만, 쌈 채소와 크레이프의 습기 덕에 라이스 페이퍼는 적당히 부드러워지고, 고명과 함께 씹히는 아삭한 식감이 최고였다. 속의 내용물도 이것저것 바꿔 넣어볼 수 있어 다채로운 맛을 즐기기도 좋았다. 나는 반쎄오가 정말 맘에 들었다. 만약 다시 다낭에 간다면, 그건 아마도 반쎄오를 다시 먹기 위해서일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반쎄오를 배부르게 즐긴 후 길거리에 작은 탁자를 내어놓은 커피집에서 진하디진한 베트남 커피를 마시며 건너편 강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며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좀 전에 즐긴 반쎄오의 맛 평가로 시작한 대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닌 ‘쌈’이라는 문화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쌈을 좋아하지 않는 취향으로 이야기의 주제가 또 한 번 변주되었을 때 나는 무심하게 지나가듯 말했다.
“우리 아빠도 쌈 싫어했어. 나처럼 음식에 손대는 건 다 싫어했다니까.”
나의 이 말에 남편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아버님을 닮았구나.”
그 순간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 말이 갑자기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은 듯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손에 음식 묻는 것이 싫어 생선구이도 적극적으로 발라 먹지 않으신 덕에 결국은 일생 엄마가 생선 살을 발라줘야 했던 아빠. 태어나서부터 엄마가 발라주는 생선구이만 먹은 탓에 이 나이가 되어서도 깔끔하게 생선 살을 발라 먹을 줄 모르는 나. 이제 생선 살을 발라줄 엄마는 없고, 아빠처럼 음식에 손대는 것은 여전히 극혐하니 젓가락으로 대충 쉬운 부분의 살만 발라 먹을 뿐이다.
내가 아빠를 닮았지. 내가 아빠를 닮았어.
이제 부모님이 안 계시지만 의도하지 않은 삶의 어느 순간, 어느 발걸음 끝에서 이처럼 부모님을 만난다.
취향이란 마음의 방향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마음. 어떤 것에 특별하게 갖는 마음. 그런 마음의 방향.
사람이 떠나고 나면 반드시 문서로, 혹은 사진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취향으로도 떠난 이의 삶은 이어진다. 나는 길가의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이국의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오래 보았다. 내 눈앞까지 흘러온 저 강물이 어디까지 흘러갈까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