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트와 물감, 붓을 꺼내어 나란히 정리한다. 그리고 한지를 바른 부채를 꺼내어 놓는다. 한지 부채를 하나 가득 채운 건 넓은 잎을 가진 연꽃도안이다. 이제 그 도안에 색을 입혀 푸르고 싱싱한 잎과 끝에 연지를 바른 듯 살짝 붉게 물든 흰 꽃잎의 백련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손바닥보다 넓게 펼쳐진 연꽃잎은 푸르다 못해 파랗게 빛난다. 짙은 녹색에서는 그만 초록 물이 배어 나올 것만 같다. 여러 송이의 연꽃 봉오리 중 어떤 것은 이미 활짝 열렸고, 또 어떤 것은 여전히 수줍게 오므린 모양새다. 연꽃잎을 흰 물감으로 꼼꼼하게 칠하고 그 끝에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자연스럽게 붉은빛을 퍼뜨린다. 은은하고 부드럽게 색이 퍼져야 고아한 연꽃의 자태가 완성된다.
나는 연꽃 도안이 인쇄된 한지 부채를 물끄러미 봤다. 머릿속에선, 언제나 상상 속에선 이처럼 그 과정이 순서대로 떠오르고 이내 멋진 그림 한 점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현실에선 다르다.
도안이 그려진 한지 부채 앞에서 붓을 들고 선 나는 막막하다. 빈 팔레트에 물감을 풀기 시작할 때부터 난감하다. 늘 모든 과정은 머릿속에만 있고, 결과물은 상상과는 달리 한심한 수준을 면치 못할걸 알기에.
처음 내게 민화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민화 수업을 업으로 하는 분이 아니었다. 유명한 민화 작가에게 사사하시었고, 국전 입선의 경력도 있지만 현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작품활동을 하지 않는다. 앞에 앉아 하나하나 세세히 가르쳐주신 덕에 겁 없이 민화를 즐겼다. 그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이며 소중한 배움의 시간이었는지 나중에야 알았으므로, 막상 그림을 배울 때엔 ‘색칠 놀이의 고급 버전’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할 수도 있었다. 그저 이웃이라는 이유로 나는 그처럼 쉽게 민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놨던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더 이상 민화 수업을 받을 수는 없게 되었지만, 지금 나는 혼자서 계속 민화를 그리고 있다. 아니다. ‘계속’이라고 말하기엔 사실 드문드문 그린다. 다만 마음만큼은 늘 민화의 언저리에 있으니 ‘계속’이라고 우겨본다.
두 해 넘게 민화를 배웠으니 다른 선생님을 찾아보지 않고도 혼자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이내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란 걸 깨달았다. 초록은 노랑과 파랑을 섞어서 만든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초록이라고 해서 다 같은 초록이 아니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노란색을 좀 더 섞으세요. 파랑은 그만 해도 되겠어요.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초록의 그 미묘하고도 다양한 색을 내주셨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그런 초록을 다시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만들어낸 초록은 늘 어딘지 조악하고, 저렴한 느낌일 뿐이었다.
몇 장의 그림을 혼자 그리고, 매번 좌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민화 세계의 언저리를 맴도는 중이다. 일본 여행길에선 일부러 화방을 찾아 물감을 한두 개씩 사고, 시간이 날 때면 괜히 한 번씩 민화 재료를 파는 온라인쇼핑몰을 들락거리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온라인쇼핑몰에서 내 눈을 잡아당긴 건 나비 날개 모양이라 일명‘나비 부채’라고 불리는 한지 도안 부채였다.
부채라. 나는 다양한 도안의 나비 부채들을 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인 연꽃뿐 아니라 모란, 백합이 있었다. 그뿐인가. 호작도나 책가도도 있었다. 연꽃과 모란이 그려진 두어 종의 나비 부채를 여러 개 주문해 받았다. 아직 채색도 하지 않은 한지 부채를 쌓아놓고 괜스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문득 달력을 들여다봤다. 입춘이 지났고, 어느새 경칩도 지났다. 이제쯤은 봄이려니 하지만 사실 내 마음은 이미 여름에 가 있다. 어린 시절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학생 때는 매번 방학을 기다렸다.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줄었다. 아무리 기다리는 것이 있어도 그것은 때가 되어야 오는 것이지 내가 조급하게 군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는 이제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나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 제대로 봄이 오지도 않았는데 어느 그늘아래 한가로이 앉아 나비 부채를 설렁설렁 부치는 여름 한낮을 상상해 본다. 아직 초연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나는, 나비 부채를 들고 무심한 듯 뽐내며 부채질하는 여름을 기다리다가 문득 도리질을 친다. 시간이 빨리 흘러 좋을 일이 무엇이라고.
하지만 역시 사는 일엔 이처럼 기다리는 시간도 있어야 한다. 그 기다림을 준비하며 노랑과 파랑 물감을 섞어 초록을 만들어내는 즐거움도 있어야 한다. 비록 그 초록이 내 상상 속의 초록이 아니고, 연지처럼 붉게 퍼지는 색감이 내가 그려내고자 하는 채도와는 거리가 멀지라도 여름을 기다리며 색을 섞고, 한지에 색을 칠하는 시간은 소중하다.
나비 부채에 그려진 연꽃과 모란을 다시 본다. 갑자기 여름이 성큼 내게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