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 나의 가을

by 전명원

성인대상의 에세이수업을 여러 해 동안 하고 있다. 다들 ‘글쓰기를 배우러’ 온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나는 그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쓰게 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들을 쓰게 하려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주제’다.


이번 분기의 글 주제를 직접 정해보아요, 라고 했더니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다. 계절, 사람에 이어 희로애락 같은 감정까지 다양했다. 그렇게 정해진 이번 주 과제는 ‘가을’이라는 주제로 한편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화요일 수업이므로 과제 마감은 토요일 자정까지다. 학창 시절에서 까마득히 멀어진 수강생들은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하며 대부분 빠짐없이 과제를 제출한다. 한주 내내 과제 생각만 하며 고민한다고 하시면서도 “수업하고 목이 마르실 테니 집 갈 때 드시라” 며 웃는 얼굴로 사탕 몇 개를 내미신다. “매번 과제를 못 내서 죄송한데, 선생님은 재밌어서….”라고 말하며 나가는 길에 쿠키 한 조각을 스윽, 주시는 분도 있다. 그런 작은 손길과 한마디로도 내가 에세이 수업을 하는 즐거움은 충분하다.


수강생들의 연배는 60대가 대부분이다. ‘가을’을 주제로 한 과제가 하나둘 날아오기 전까지 나는 그들의 글을 상상했는데 단풍, 여행을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수강생들의 과제는 대부분 ‘인생의 가을’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의 원고 하나하나를 읽으며 반성했다. 그들은 내가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사람들이었는데 오히려 내가 얕은 사람이었구나! 깨닫게 된 것이다.

수강생들은 60대인 자신들이 인생의 가을을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가을은 열매가 풍성하고, 단풍이 울긋불긋한 멋진 가을이 아니었다. 수확이 끝나고, 단풍은 다 떨어져 버린 늦가을의 어느 날에 자신들이 서 있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그들은 남은 가을이 아쉽다고 했고, 다가올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을 이야기했다.


글을 읽으며 생각한다. 나라고 다를까.

읽고 있던 수강생들의 원고를 잠시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지금 어느 계절을 걷고 있는 것일까. 봄일 리도, 여름일 리도 없다. 나 역시도 가을을 걷는다. 나의 가을엔 아직 노란 단풍이 있을까. 붉고 고운 사과가 열렸을까.


집 근처에 내가 좋아하는 산책길이 있다. 단풍이 드는 계절이 오면 노랗고, 붉은 단풍이 꽃보다 예쁘다. 하지만 감탄하며 그 길을 걷다가도 바닥에 낙엽이 쌓여 바스락 바스릭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낙엽이 쌓이면 쌓이는 채로 환경미화원분들은 그 낙엽을 치우지 않으신다. 그러다가 나무의 나뭇잎이 다 떨어진 어느 날이면, 그 길에 쌓인 낙엽은 거짓말처럼 모두 사라지고 대신 빵빵하게 속을 채운 커다란 마대 여러 개가 이곳저곳에 모여있다. 그렇게 갑자기 산책길이 휑해져 버린 그때가 가을이 끝나는 즈음이고, 겨울이 시작되는 때다. 그러니 낙엽이 쌓이고, 발밑에서 마른 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오후에 그 길을 산책하다 보면, 끝나가는 가을 생각에 절로 마음이 조급해졌던 것이다.


잠시 덮어두었던 수강생들의 원고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 다가올 날들에 대한 걱정이 전해져왔다. 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서럽고 아팠던 날들을 떠올리는 그들의 가을을 봤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의 가을 끝자락은 약속이나 한 듯이 희망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지금의 가을을 잘 살아내고 싶다고, 오는 겨울을 잘 맞이하고 싶다고 말했다.


“너무 좋아요.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어디가서 나눌 수 있겠어요.” 그들은 내게 말한다.

“이 나이에 이런 공부를 할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하지요.”라고 하는 누군가의 말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인생의 가을에 들어선 나도, 오늘을 걸으며 생각한다. 내가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다. 그들의 추억을, 상념을, 그 속에 담긴 에너지와 희망을 내가 전해 받는 것이다.

이처럼 계절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니 오늘은, 오늘을 누릴 뿐이다.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발밑에 부서지는 마른잎의 감각을 느끼면서.

매거진의 이전글부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