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단순한 패배자의 국가가 아니었다”
얼마 전 읽은 <일상이 고고학_나 혼자 백제 여행 (황 윤)>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말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중 백제에 대해 갖는 감정은 어쩐지 고구려와 신라사이에서 망해버린 ‘비운의 국가’에 가깝다. 사실 이 책을 읽기전,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백제에 대한 특별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건 <잃어버린 왕국 (최인호) >에 흠뻑 빠졌던 경험 이후부터였다. 그 책을 읽느라 대학 첫학기의 여름방학은 도서관에서 내내 보냈을 정도였다.
그랬기에 이 책, <나 혼자 백제여행> 을 읽는 내내 나는 “이제야 백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 열린 것이다.”라는 작가의 백제사랑을 이해하는 동시에, 나의 스무 살 시절도 함께 떠올리게 됐다. 그렇다면 이번엔 ‘익산’으로 가보기로 했다.
먼저 간 곳은 왕궁리 유적이다. 왕궁리 유적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 자리 잡고 있으며, 1989년도부터 본격적인 전면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곳이다. 이곳의 유적은 현재 5층 석탑과 석축, 그리고 주변의 건물지가 남아 있다. 안내판이 꽤 잘되어 있어서 천천히 걸으며 크기나 위치를 가늠해 보기 쉽다. 햇살이 좋은 3월 마지막 주의 평일이었다. 느릿한 발걸음으로 한적한 왕궁터를 돌아보고 5층 석탑도 한참 바라보았다.
작년에 나는 김해 등지의 가야의 유적지를 모두 돌아봤었다. 그때에도 유적지 부근마다 박물관이 하나씩 있어 꽤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곳 역시 백제 왕궁박물관이 바로 인접해 있었다. 박물관 내부엔 전시물이 풍부한 것은 아니었으나 시대별 구성을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잘 정리했다는 느낌이었고, 무엇보다 게임처럼 흥미를 유발하는 전시 방법이 좋았다. 게다가 오픈수장고가 있어 유물이 어떤 식으로 수장고에 보관되는지 알게 된 점은 꽤 흥미롭다. 그뿐 아니라 전망 좋은 통창을 가진 작은 도서관 공간까지 있어 지역주민들을 위한 좋은 공간이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음에 찾아간 곳은 미륵사지였다. ‘미륵사지’라는 이름처럼 이제 건물은 없고 터만 남았으나 둘러보면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다는 설명이 이해가 간다. 비록 돌무더기와 군데군데 복원한 석탑, 그리고 당간지주 정도만 남아 있지만 그 넓은 터에 서서 불어오는 봄바람속에 잠시 서 있다보면 예전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오래전, 이곳에 서 있었을 거대란 미륵사와 어디 한 곳 부서진 데 없는 석탑을 상상했다. 어쩐지 세월 앞에 쓸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639년에 창건되었다는 이 미륵사지의 석재들을 보며 그 오랜 세월 동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역사를 전하는 것들에 마음이 닿으면 쓸쓸함은 곧 숙연함으로 바뀐다.
옛 백제를 품은 익산을 보았다면, 이제는 지금의 익산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차를 몰아간 곳은 황등시장 건너편의 ‘어스 언더 파크’이다. 예로부터 석재가 유명했다는 익산답게 거대한 채석장이 있고, 그 채석장을 조망하는 카페와 전망대를 만들었다. 거대한 산 하나가 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오랜 세월동안 그 돌을 마치 네모난 두부 자르듯 잘라내며 땅속으로 파내려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그랜드캐년과도 같은 풍경도 놀라웠다. 심지어 그 채석장에선 여전히 채석활동을 한다.
아마도 요즘 익산이라면 가장 핫한 곳이 바로 이곳, ‘어스 언더 파크’일것이라는 짐작대로 평일 오후였지만 카페안에는 외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통창밖으로 거대한 채석장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시는 한때라니.
익산의 도로는 한적하고 어디든 소란스럽지 않아 좋았다. 하지만 주말이면 어스언더파크 주변은 아마도 사람이 넘쳐날듯하다. 그들은 온김에 미륵사지도, 왕궁리 유적도 돌아보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방의 인구가 줄고, 사람들은 수도권으로 몰리는 시대지만 이처럼 볼거리가 있다면 편도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전해서도 찾아가게 된다. 즉, 사람들을 ‘찾아오게 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내가 오늘 보았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의 옛 백제 역사가 있는 익산. 그리고 어스 언더파크와 맛있는 비빔밥이 있는 지금의 익산. 둘 다 좋았다. 옛것과 새것이 함께 있어서 더 좋았을 것이다. 멋진 ‘백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