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행복훈련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티 Mar 04. 2021

근육 훈련처럼 마음훈련을 시작했습니다

'공부 때려치우고 훈련으로'


‘시작했습니다’하고 단언을 해본다.

그래야만 진짜 시작하고 이것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마음 훈련’이라고 적고 보니, 참 괜찮은 말로 느껴진다. 

‘그래, 마음인들 훈련이 왜 안 되겠어.’ 

훈련되지 않는 것은 없을 것이다. 

훈련하는 데 시간이 길고 짧거나 고되거나 쉬운 게 있다는 건 인정하겠다. 

어떠하든 마음훈련을 해볼 것이다. 

근육처럼 마음도 훈련하다 보면 어느새 점점 단단해지고 힘이 생길 것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마음공부 한다고 보낸 시간들


‘마음공부’란 말을 달고 산지가 20년이 넘었다. 

열병을 앓듯이 깨달음이란 말이 너무 크게 다가왔던 때부터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며 “도대체 깨달음이란 게 뭐지요?”하고 묻고 또 물었다. 

나란 존재가 뭘 자꾸 하려 드는 성취형 인간으로 힘들게 살고 있는데,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건지 해답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이치가 뭔지 좀 깨치고자 하는 욕망은 자꾸 커져갔다. 


아주 구체적인 무엇, 어떤 순간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깨달았을 때’가 어떤 순간이며 ‘깨달은 느낌’은 무엇이며, ‘깨달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찾아 헤맸다. 좌충우돌형 경험주의자답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두서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일가를 이루어 도반과 함께 하는 수양자들을 찾아다니고, 도덕경 과외를 해봤다. 

찾고 또 찾아도 도대체 무엇인지 선명해지지 않았다.

     

시원치 않은 와중에도 아주 조금씩 문리가 텄다. 마음의 작동원리를 깨달아가고, 자승자박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나를 고달프게 하는 그 많은 것들이, 특히 내 삶의 문제적 남자인 남편이 나로 하여금 마음의 바닥을 보게 하도록 이끌어 이치를 깨치도록 도왔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궁극적 목적은 허망하게 끝났다.

"내가 왜 살아야 하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하며 거대 질문을 해댔는데, 답은 너무 간단했다.  




그냥 살라니요?


너무나 선명하고 가벼운 답. 

“그냥 사는 거다.”


'지금 여기 이대로 그냥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어왔다. 

"깨칠 게 없다", "너는 이미 깨쳤다" 등류의 말을 읽고 또 읽고, 듣고 또 들었는데도 도대체 다가오지가 않았다. 


"뭐야, 또 그런 말이군."  


나를 울리지 못했다. 아니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었다. 그런 대답은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개고생 하며 살고 있는 의미를 명확하게 찾고 싶은데, 성이 차지 않았다.

 

"아주 논리 정연하고 명확한 답을 내놓으란 말이야!"


오랫동안 이런 생각으로 고집을 부렸다. 

'시원 상쾌한 깨달음'이란 상(相)을 절대 놓을 수 없었다. 깨달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깨달음이라는 말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살고, 길가의 풀포기와 같은 존재로 살 것이며, 풀포기보다 못한 존재임을 인정하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말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진리는 아주 심플하다는 게 진리인 걸 이제 알겠다.  


<놓아버림>이란 데이비드 홉킨스의 책이 나를 많이 도왔다. 

직장을 떠나야 할 때였다. 두 번이나 원해서  직장을 시원하게 그만둔 이력이 있는 나였다. 하지만 내 의지가 아니라 계약 만료라는 명분으로 원치 않는 퇴사를 앞두고 큰 상실감이 왔다. 그때 '놓아버림'이란 말이 강한 끌림으로 다가왔다. 


"그래, 놓아버리자." 


그냥 '놓는' 게 아니라 '놓아버린다는' 게 너무, 정말 너무 괜찮게 다가왔다. 


"그래, 놔버려!!!"


퇴사 후 석 달을 도서관에 다녔다. 그리고 데이비드 홉킨스 책을 팠다.

많은 것을 놓아버리게 되었다. 

어떠하다, 또 어떠해야 한다라고 생각했던 상(相)들을 조금씩 놓아버릴 수 있었다. 

가만가만 따져보니 놓아버릴 게 한정도 없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삶의 의미가 뭔지에 대한 깨달음조차 상(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냥 사는 게 진리라는 게 그제야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그냥 살고 있다.




웃고 울고 까불며 그냥 살겠다 

     

그냥 사는 게 '기분 좋게 잘 사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

여전히 좋은 것, 나쁜 것 따지고 웃고 화내며 진하게 살고 있다. 

까이고 얻어터지는 기분이 더럽도록 진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여여한 게 없고 평온도 잠시 잠깐이며 하나부터 열까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그런 까칠한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만나는 건 참 쉽다.


다만 희로애락에 춤을 추고 있는 나를 보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다. 

기쁘고 슬프고 좋고 화나는 모든 일상을 ‘그럴 수 있지’하고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조금씩 모양이 나온다.

그렇지만 한번 화가 나는 장세로 접어들면 주체를 잘 못하는 것은 여전하다. 화가 나고 속상해하는 나를 나는 불안하게 지켜본다. 

“뭐, 여전히 한 성질 하는 나인 거지.”


웃음이 좀 헤퍼지기는 했다. 

남편의 우스갯소리에 넘어가며 잘 웃는다. 잘 웃어주니까 그의 유머 기질도 계발이 되는 것 같다. 그는 마누라 잘 만나서 유머 소질 계발 중이다.


웃고 울고 화내고 까불며 그렇게 살고 있다. 




공부 말고 그냥 트레이닝이나 해볼까 한다


마음속으로 '나는 마음공부하는 이다'라고 하고 산 지 오래되었다. 

공부가 오래되니 몰두가 쉽지 않다. 

또 진척이 없을 때는 공부 못하는 사람이 주눅 들 듯 그렇게 나를 책망하게 된다. 

평온하게 그냥 살고 싶은데, 그냥 살기만 하고 평온하지는 않다.  


공부에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마음공부를 마음훈련으로 바꿔보려고 한다. 

훈련한다고 생각하니 좀 가벼워진다. 

더 많이 가벼워지는 게 내 인생의 숙제다.

근육 훈련하듯 마음도 조금씩 반복해서 훈련하면 강해질 게 분명하다. 

가벼운 건 강한 것이다.


‘마음훈련’을 하고 싶도록 부추긴 건 하버드 의대 대학 스리니바산 S. 필레이 교수다. <두려움, 행복을 방해하는 뇌의 나쁜 습관>을 쓴 필레이 교수는 뇌를, 마음을 훈련시키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의 통찰력은 여전히 맨날 얻어터지고 깨지고 있는 것 같은 마음 학습자인 나에게 많은 영감을 던져주었다. 


나는 공부 때려치고 훈련을 시작했다. 

행복해질 것이다. 

행복도 근육처럼 키워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애 키우고 일까지 했는데 바보가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