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들이 아니라면, 사춘기 이후 라면 아들들은 그런 말 듣는 걸 썩 달가워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엄마가 그걸 입에 담기까지는 속으로 '얼마나 잘생겼게요!' 하고 이미 수십번의 감동이 이어진 다음일 가능성이 높다. 엄마의 감정을 아무 때나 쉽게 드러내면 안된다는 걸 눈치빠르고 현명한 엄마들은 알아버리고 말지만, 저절로 입에 담게 되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내가 만들어놓은 작품인 아들이 저절로 감탄사 나오게 만들 정도로 잘생겨 보이는 것이다. 아니, 아주 잘생겨 보이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이성이 작동하기도 하는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온다.
그래서 아들의 펑퍼짐한 얼굴, 두리뭉실한 코, 볼록해진 배, 꾸부정한 어깨 등이 너무 현실적으로 눈에 들어오고, '얘가 내가 낳은 애가 맞지?' 하고 머리를 흔들곤 한다.
'한 번씩 까칠한 게 지 아비를 닮은 게 틀림없는 거지?'하고 마음의 거리를 두려고도 한다.
그래도 울 아들은 옆모습이 너무 멋지다.
언뜻 보면 스마트한 분위기와 예술적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분위기가 종합적으로 풍긴다.
매력적이다.
얘가 모태솔로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세상의 여식들은 모두 눈이 삐었다. 이런 애를 여태 솔로로 두다니.
가만히 앉아서 눈 마주치며 대화를 좀 한번 나눠 보란 말이다. 세상을 보는 식견이 뛰어나고, 뭐 모르는 건 없으면서도 한 번도 나대지 않는 저 퀄리티 있는 겸손함이라니!
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믿을 만하다고 보면 된다. 신뢰 작렬이다.
음악적 감각은 또 얼마나 있는지, 듣는 거부터 연주하는 거까지 골고루 환상적이다.
얘한테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골고루 삼박자 다 갖췄다.
이건 엄마인 내가 보장한다. ㅋ
웃음이 나오긴 하지만 나는 진지하다. ㅋㅋㅋ
시어머니 '눈' 때문에 며느리는 괴롭다?
정말 그런 얘기는 안 하면 좋은데, 우리 시어머니가 자주 하셨던,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바로 나오는 말씀이 있다.
"우리 집은 인물 집안이라...."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하신다. 그 '무신' 동네여요?
누군가 분명 한마디 했음에 틀림이 없다. 사랑스러워 보일 수도 있는 어린 남매들을 보며, 이 집 애들은 참 이쁘다고 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한마디는 평생 갈 수도 있다. 조심해야 한다. 며느리를 평생 괴롭힐 수도 있다. 도저히 공감이 안 되는 말을 듣고 사는 건, 쪼끔 과장하면 고문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뭐 그렇다.
거기다 당신 아들에 대해 시어머니는 "아주 확실한, 틀림없는 애"라는 평가를 덧붙인다.
확실하다, 틀림없다는 표현은 좀 막연하다. 이건 아들 자랑을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서 하기 어려울 때 엄마들이 자주 내미는 언어이다. 이 역시 며느리의 공감 밖 언어들이다.
남편이 '인물 집안' 태생으로서 인물이 상당한 수준이며, 확실하고 틀림없는 사람으로서 뭐든 믿을만하게 제대로 하는 수준으로 평가받는 건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기분이 별로 안 좋은지 모르겠다. 정말 잘나서 잘난 체하는 사람도 볼썽사나운데, 잘나지도 않으면서 잘난 체하는 사람을 보는 건 고역인 건 어쩔 수 없다. 부부관계, 모자관계,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가 얽히면 감정이 증폭된다.
남편을 보는 시어머니와 아들을 보는 나의 시각은 뭐가 다를지 곰곰이 이성적으로 성찰해본다.
내가 그 정도의 사리분별은 있다.
내 아들이 아무리 잘생겼어도, 장차 며느리 앞에서는 그 확실한 느낌조차 발설하면 안 된다는 걸 깨우치고 만다. 허벅지 찌르며 참아야 한다. 잘생긴 아들을 잘생겼다고 말하면 안 된다. 며느리 앞에서는 절대로 안된다. 아들이 곤경에 처할 수 있다.
장동건 닮은 동생이 제 딸이 더 예쁘다는데
우리 집 막냇동생은 정말 장동건을 닮았다.
키가 훤칠하니 골격이 크고, 두상이 좀 작으면서 동그란 건 외가를 닮았다. 부리부리하게 큰 눈에 살짝 각진 얼굴은 아버지에게서 왔다. 거기다가 눈동자는 사슴마냥 선하다.
동생이 장동건을 닮았다는 말을 하면 언니가 격한 공감을 표하면서도 항상 따로 하는 말이 있다.
"올케 앞에서는 그런 말 하면 안 돼. 싫어해."
"어머, 왜? 지 신랑이 장동건 닮으면 좋은 거 아냐?"
'인물 집안' 출신 얘기를 들으며 기분이 안 좋았던 나는, 장동건 얘기 듣고 싫어하는 올케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시어머니 꼰대가 아니고 누나니까 좀 이성적이면서 객관적이라고 자평하는데, 무슨 이런 당치 않는 반응이란 말인가.
딸은 아빠를 많이 닮는다는데, 장동건 닮은 동생이 만들어놓은 딸은 역대급 역도선수 꿈나무 같았다.
일단 신생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굵었다. 얼굴에서는 아빠의 수려한 외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야, 튼실하다. 역도 선수시키면 되겠다. 장미란 버금가겠어."
그 말을 듣고 워낙 착한 동생이 웃는다. 그런데 좋은 얼굴이 아니다. 그래 무조건 이쁘다고 말해야 하는 건데, 실수했다.
무조건 이쁘다고 말한 시댁의 동네 그 선한 어른의 말은 돌고돌아 보니 현명한 것이었다.
동생 딸, 그러니까 나의 '귀여운' 조카가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 귀여운 애가 점차 클수록 여성스럽고 사랑스러워졌다. 얼마 전 우리 딸이 절대 하면 안 된다는 외모 평가를 동생과 함께 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역대급으로 사랑스러운 예쁨을 잃지 않고, 클수록 예쁨지수를 상승시키고 있는 우리 딸 보다 동생 딸이 더 예쁘다는 것이다. 귀를 의심했다.
"어머, 무슨 그런 말을... 예쁜 걸로는 우리 00과 너네 00을 비교하면 안 되지."
너무 당당하게 말했는데, 동생의 표정이 어이없다는 게 역력하다. 너무 진심이 느껴진다.
자기편은 무조건 좋게 보이는 필터
부모 눈에 낀 필터는 그 어떤 필터보다 강력하다. 도저히 그 어떤 것도 따라올 수 없다. 그래서 고슴도치 어미는 제 새끼 털이 부드럽다고 한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이다. 나하고 가까울수록 더욱 강력한 자기화가 일어나고 끈적한 연결고리와 감정으로 엮인다. 부모 자식에서 형제로 이어지는 자기화는 자기와 유사한 집단을 찾는 것으로 점차 확대된다. 여기에는 객관이란 게 개입될 수 없다. 객관이란 거는 애당초 존재하기 어려운 딴 나라 얘기일 수 있다. 정말 나와 아무 상관없는 대상에게서만 가능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 상관없는 대상이 존재할까. 어떤 사고방식이나 의견, 취향 등으로 편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들과 남들을 가르는 순간부터 대상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들 집단'에는 긍정적인 속성들이 자리한다. 우리 팀 선수들은 더 영리하고, 더 멋지고, 더 빠르고, 더 강력하고, 더 겸손하고, 더 뛰어나다. 반면 상대 팀은 루저들이며, 동정이나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실컷 욕을 퍼붓는다. 그럴수록 자기 집단이 훨씬 더 뛰어나 보인다.
편 가르기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실험이 진행되었다. 영국 사회심리학자 헨리 타이펠(Henry Taifel)이 야영장에서 최소 집단 실험을 했다. 참가자들을 단순히 동전 던지기로 두 그룹으로 나누고 여러 가지 과제를 수행하게 시켰다. 서로 전혀 몰랐던 구성원들의 두 집단은 어떤 차이점도 없었다. 하지만 몇 분 만에 자기 집단을 옹호하는 강렬한 감정을 키워냈다. 팀 구성원을 열렬히 응원했고 성과를 터무니없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른 집단은 멸시했다. 상대 팀 선수들을 목이 터저라 야유하고 모욕했다.
이 결과를 두고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의 저자 장동선은 "집단사고와 따돌림은 아무런 근거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남들이 '남들'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어떤 집단에 형성되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사소한 행동 패턴들에 스스로 동조한다. 자신의 뇌를 이용해 훌륭하게 모의실험을 한다. 심한 경우 자기 집단의 누군가가 다치면 자신의 뇌 통증 담당 부위가 활성화된다. 반대로 상대편 누군가가 걸려 넘어지면 뇌는 고소해하는 신호를 보낸다.
자기 집단을 적절히 편애하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합니다. 결국 우리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서 자기 집단에 의존하고 있으니까요. 자기 집단에 이득이 되게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도 도움이 됩니다.
<뇌 속에 또 다른 뇌가 있다>를 통해 살펴보면 나와 다른 것, 낯선 것을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는 작용은 여러 가지 실험에서 뇌의 작용인 것으로 드러난다.
내편과 남의 편을 '분류하는 서랍'은 매우 단편적이었다가 다양한 경험과 정보, 훈련이 더해지면서 점차 공평해진다. 뇌가 생각을 바꾸고 편을 재편성하는 능력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굳어진다. 정보가 적을수록, 자기 마을에서 벗어난 경험이 없을수록 낯선 것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우리 편이 넓어지면 달라질 것들
한편, 편 가르기 좋아하는 뇌는 놀라울 정도로 역동적일 수도 있다. 적이었던 사람들도 한편이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2008년 미국 대통령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경쟁했다. 하버드 대학의 마틴 노왁(Martin Nowak)과 예일 대학의 데이비드 랜드(David Rand)는 이 과정을 면밀히 관찰했다. 또 이 과정에서 간단한 게임을 이용해 지지자들이 서로를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테스트하는 실험을 했다. 두 후보 지지자들은 몇 개월간 서로를 매우 좋아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았으며 적대적이었다. 그 후에 오바마가 후보로 지명되는 날이 왔다. 그러자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들이 하루아침에 오바마 진영으로 옮겨갔고 이들은 진심으로 오바마를 환영했다. 대립관계는 사라졌다. 적이었던 지지자들이 하루가 다르게 융화되고 민주당원이라는 우리 편으로 뭉쳤다. '남의 편'이 민주당의 서로 다른 지지층에서 공화당으로 바뀐 것이다.
정치인들이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편 가르기다. 편이 세분화될수록 결속력은 더 강해질 수 있다. 이런 분위기가 가속화되면 국민을 위한다든지, 미래를 위하는 것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오직 내편인지, 다른 편인지만 구분하고 다른 편은 악으로 규정된다.
반면에 내편의 범위를 늘리는 '인식의 환기작업'이 있으면 편을 가르던 장벽이 무너지거나 재조정되기도 한다. 서로 흠집 내며 싸우다가도 한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적이었던 그들이 '알고 보니 내편'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딸을 키우는,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청년을 자식으로 둔 부모이기에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한나라 국민이기 때문에 한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외친다. 중국과 어떤 연대감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아시아인 전체가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걸 보면 아시아인이라는 편에 속해 있다. 이렇듯 우리는 뜻하지 않게 어떤 편이 되곤 한다. 어느새 내 편들이 자꾸 확장된다.
전 세계가 코로나를 똑같이 경험한 이 시대적 공감대는 지구인이라는 '내편 의식'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발상의 전환을 기대해 본다. 전 지구인이 이렇게 똑같은 패션으로 서로를 마주한 적이 없다. 우리는 모두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있다.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콕 생활을 하면서 서로를 두려워하기도, 또 서로를 이렇게 그리워해 본 적이 없다.
혹자는 포스트 팬데믹 현상으로 이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이 늘어날 것으로 예측하지만 더 넓게 보면 지구인이 이렇게 강력하게 한 시대를 공유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혹독한 경험과 훈련으로 집콕 생활을 하고, 마스크와 거리두기로 나를 위하면서도 남을 위하는 경험은 '인류가 알고 보니 한패이고 한편'이었다는 인식의 전환을 이룰 퀀텀점프가 될 수 있다. 이 시대를 지나고 나면, 지구인들은 누구를 만나든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견뎌냈는지 얘기를 나누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대책 없는 긍정주의자이다. 나는 지구인 편이다.
그래도 지구인 중에서 우리 아들이 잘 생겨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전 세계 엄마들은 모두 공감하는 사실일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