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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이라는 터널 안에서

나는 희망한다




  지난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무덤덤하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난 지금 아직 무심한 듯 무덤덤해지지 않았고

내게 일었던 폭풍 같았던 감정들을 가라앉히기엔 심각하게 얼얼한 상태다.

조금의 자극으로 그 얼얼함은 다시 송곳에 찔린 것 같은 아픔이 될 수도 있고,

황산에 살이 녹아내리 듯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서울의 어느 카페에 앉아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느릿느릿 헤쳐나가고 있는 아이를 기다리며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을 때,

적어도 오늘만큼은 더는 미루지 말고

그동안에 써왔던 소설이 아니라 나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두르려 보자, 생각한다.


이제 조금은,

지금의 그 얼얼한 감정을 어루만져 무심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리하여 나 역시도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직은 희뿌연 기대감 내지는 희. 망.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지나간다.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테이블 자리를 맡기 위해,

직원들은 손님들의 주문을 분주히 받고 있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들고, 노트북을 펼치고 열심히 지성을 소모하고 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노란 머리 외국인이 시크한 자세로 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며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내길 저항하는 자아를 달래기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폭풍의 한가운데 있을 때조차,

나는 다른 사람들 역시 저마다 인생의 한 구절에서는 분명 어떤 저항할 수 없는 삶의 잔인한 장난질에

한발 내딛기가 두려운 날들이 있었을 거라는,

그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그런 실낱같은 위안을 가지고 하루를 버텨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을 거라는 위안은

실로 힘든 하루를 견딜 수 있게 한 유일한 힘이었다.

다수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을 맹렬하게 비난하고 경계했던 내가,

정작 삶이 힘에 부칠 때는 그 다수의 힘에 의지하고 있다.


꿈같은 휴가를 나온 일등병 두 명이 커피를 주문하고 더할 나위 없이 꼿꼿한 정자세로 서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젊음이 내뿜는 그 의기양양한 힘, 자유로움, 활기, 혼돈, 우울, 희열, 기쁨, 희망이여.


나의 아이도 그만의 어둠에서 나와

네가 지배하는 시간을 지나올 수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네 안에서 울고 웃고 길을 잃고 헤매다 길을 찾고,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발을 내딛기로 결심하고

넘어지고 절망하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시간의 길 위에 서 있기를,

젊음 너라는 시간 안에 몸을 푹 담았다가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를

엄마는 희망한다.


회색빛 꽁지머리를 짧게 묶은 점잖은 노인이

카페 구석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있다.

그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전혀 조급하지 않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밖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가 여느 젊은이들처럼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긴다.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쓰고 그의 시간을 읽어 내려간다.


나의 남편이여, 당신의 시간이 이토록 힘들었던 것은 당신 탓이 아니었다는 것을,

당신도 이미 알고 있듯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삶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에,

우리는 다만 시간이 인간에게 허락한 삶의 지문을 망각하지 않고 다시 그 길 위에 서서 시간을 읽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내가 당신에게 의지가 되고

함께 시간을 읽어나가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아내는 희망합니다.


봄이 오고 있다.

봄은 언제나 나에게 잔인했다.

나는 봄을 아주 많이 싫어했다.

봄은 오고 가고

여름이 올 것이고

가을과 겨울도 몇 번이고 오고 갈 것이다.


내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내가 싫어하는 봄과 나머지 계절들을

앞으로도 계속,

읽고, 느끼고, 살아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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