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튼 아카데미’가 내게 남긴 것

과연?!


바튼 아카데미의 괴팍한 역사 선생님 폴은 문제아로 낙인찍힌 털리에게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도자기를 보여주면서 말한다.


Attik Pelike Vase Artist: akin to the Nikixenos painter Date: Early 5th century B

“사람 사는 건 어느 시대나 똑같아. 다들 삶의 희로애락을 자기 세대의 전유물로 생각하지만, 인간의 모든 욕망과 충동은 혐오스러운 것이든 숭고한 것이든 늘 여기 있어. 네 모든 주변에. 그러니까 모든 걸 비웃고 무시하기 전에 기억해. 현재와 너 자신을 알고 싶으면, 과거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걸. 역사는 그저 과거사를 배우는 게 아니고, 현재의 답을 찾는 공부야.”


“포르노를 보여주면서 그렇게 말하시니까, 이해가 팍팍되네요.”


사춘기를 한창 겪고 있는 털리의 대답이 너무 솔직해서 너무 사랑스러웠던 장면. 문득 나는 이러지 못했네, 생각하게 된다. 역사 선생님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15살의 나는 그 선생님이 괴팍하던 자상하던 바른 학생의 표본으로써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그때의 나는, 설사 반항이라는 걸 했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만 비웃고 무시했지 바깥으로 표현하는 학생은 아니었으니까. 고등학교 3년 내내 짝사랑했던 윤리 선생님에게 마저 졸업하고 한 번도 찾아가 보지 않았으니, 참 답답한 성격이다.


그나저나 폴의 말대로라면 나의 인생 역시 먼 훗날 누군가에게 배움의 기회가 될 수 있으니, 내가 느끼는 희로애락을 이 시대의 전유물인양 만끽하며 기록하다 보면 언젠가 미래의 누군가에게 답이 되지 않을까? 깊고 깊은 땅 속에서, 아니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서 우주 쓰레기들과 표류하던 내 USB를 누군가 우연히 줍고는 탄소 연대 측정법을 이용해 –미래에는 보다 진보된 연대 측정법이 발명되겠지만- 수 천 년 전 컴퓨터라고 부르는 정보기기에 쓰였던 보조기억장치임을 발견하는 거다. 그는 우리가 로제타석에 쓰인 고대어를 해독하듯 내 USB를 해독하고, 우리가 소크라테스니 공자, 스피노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삶을 통해 답을 구하듯 나의 글에서 무언가를 구하려고 연구할 것이다. 물론 내 글이 위대한 명사들의 발톱 끝에 닿지도 못할 거라는 사실은 알지만, 적어도 조선시대 평민들의 생활상처럼 21세기 평민 여성의 일생이라는 제목으로 역사적 사료로 쓰일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이 나의 이름을 아랍어를 따서 헴라즈 이무라에(يُهَمْلِجُ إِمْرَأَة, 느린 여자)라고 지어준다면 영광일 것 같다.


과연?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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