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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의 식탁

으흥흥~으흥흥~ 나 혼자 좋아 편지를 썼네.




안녕하세요, 최재천 선생님!
선생님에게 쓸 이 편지 형식의 리뷰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인사를 먼저 건네 봅니다.
안녕하세요, 최재천 선생님! 뜬금없이 누구일까 의문이 들기도 하겠지만 저와 선생님은 일면식 한 번 없는 관계입니다. 혹여라도 스치고 지나갔을 가능성도 제로에 가깝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저는 선생님의 독자일 뿐이고, 선생님은 제가 좋아하는 작가이자 교수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학생이 아니니 교수라고 부르지는 않기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불렀다가는 이 리뷰를 논문 쓰듯 써야 할 것 같으니까요. 앞으로 읽게 될 선생님의 저서들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논문은 쓰기 싫답니다.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최근이라고 해도 벌써 7년이나 됐지만, 하고 있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 독서논술지도사에 도전했다가 강의를 해주시는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지요. 직업은 못 속인다고 하필 도전한 공부가 그동안에 하던 일의 연장선 상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독서논술지도사에 대한 욕심은 거의 접은 상태입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책을 가지고 함부로 누굴 가르칠 깜냥이 못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대학을 마친 정도의 학력이라면 누구든 독서논술 공부방을 차릴 수 있다고 해당 업체들이 많이 제안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던 것이지요. 나 자신이 제대로 된 세계관과 가치관을 정립하지 못했는데, 누군가의 저서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비평하고 가르칠 입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그야말로 학생들이니까요. 결국 이년 동안 끙끙대다가 아, 이건 아니구나.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선생님 자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이 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거기에서 얻은 성과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알게 된 계기를 얘기하려다가 별 이야기를 다 하지요? 저 혼자 좋아 그러는 것이니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독서논술지도사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후로 저는 선생님의 칼럼을 읽기 위해 일부러 조선일보를 구독해 -물론 독서논술 공부 목적도 있었고요- 매주 화요일마다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최근의 칼럼으로 '동물 펜데믹'와 '꽃가루 도마뱀'이 떠오르네요. 요새는 동아일보의 유혹에 넘어가, 일 년 무료 구독권을 빌미로 조선일보 구독을 중단하고 동아일보와 경제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칼럼은 고마운 조선닷컴을 통해 만나고 있어요.

≪통섭의 식탁≫은 제가 좋아하는 중고서점에서 선생님의 저서를 찾다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수년 전 아이와 함께 선생님이 1대 박물관장으로 계셨던 서천 국립생태원을 갔었는데 그곳 도서관에서≪다윈 지능≫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더랬죠. 그 책을 마저 읽고 싶어 찾았지만 제가 사는 곳의 중고서점에는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한 손에는 ≪통섭의 식탁≫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선생님이 ≪통섭의 식탁≫에서도 언급한≪인간과 동물≫을 들고 고민하다가 텔레비전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통섭'을 주제로 했던 선생님의 강의가 생각나 결국 ≪통섭의 식탁≫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추천도서를 「셰프 추천 메뉴 3」, 「애피타이저」, 「메인 요리」, 「디저트」,  「일품요리」,  「퓨전요리」로 나누어 구분한 이유를  「셰프 추천요리 3」를 읽고 알 것 같았습니다. '불의 발견보다 중요한 요리의 발견'에서 선생님이 요리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읽고 말이지요.  

≪요리 본능≫에서 저자 리처드 랭엄은 단순히 불의 소유가 아니라 불을 사용한 요리의 발견이 우리를 진정한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요리 본능의 저자처럼 선생님도 이 책의 서문에서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내가 읽은 책들을 마구잡이로 섞어 비벼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교자상 한가득 온갖 반찬들을 여기저기 널어놓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싶었다. 그래서 서빙은 서양식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이고, 음식이 나오는 순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큰 양푼에 이 책 저 책 닥치는 대로 던져 넣고 얼큰하게 비벼 드셔도 좋다.


요리의 발견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리처드 랭엄의 생각처럼 유일하게 문자를 만들고 책을 쓰는 영장류인 우리가, 그 책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선생님은 독서는 취미가 아닌 일이 될 때 그 가치가 나타난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글쎄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책 가운데 제가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애피타이저의 도입부에 선생님이 다리 짧은 닥스훈트를 안고 빙그레 웃는 삽화가 실려있는 장면에 쓰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통섭의 식탁≫ 가운데 애피타이저 도입부


연희동 우리 집에는 열 마리의 개가 같이 산다. 일명 '소시지 개'라고 불리는 다리 짧은 닥스훈트들이다. 사춘기를 겪던 아들을 위해 데려온 한 마리가 대가족을 일궈냈다. 명색이 동물행동학자인 나이지만 열 마리는 사실 좀 너무 많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늘 개들과 함께 자란 아내는 무척 행복해한다. 자연과 동물에 대한 사랑은 함께 부대끼면서 크는 것 같다. 우리야 행복하지만 우리 집 담장 너머 이웃들은 불편해한다. 시끄럽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 개들에게 교양 있게 조용조용 대화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웃들에게 왕따 당하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개들에게 교양 있게 조용조용 대화해달라고 부탁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우리 집 개들에게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에 큰 동질감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개들에게 대화하는 저를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지만 전 '날개 달린 형제 꼬리 달린 친구'에서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무척이나 공감이 되었습니다. 먹으려고 들고 다니던 파파야를 땅에 내려놓은 채 석양의 장관을 지켜보던 침팬지가 결국 파파야도 잊은 채 숲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가더라는 이야기며 홍역에 걸린 '부머'가 마지막 순간 가족들의 애처로운 눈빛에 새로운 생명의 의지를 보이며 고개를 곧추세웠다는 이야기에서 우리 집 개들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과학은 저녁노을을 바라보던 침팬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날 부머의 뇌 속에서 어떤 결심의 매터니즘이 작동했는지 들여다보지 못한다. 실제로 학계에서는 이 같은 일들을 입에도 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 멀지도 않은 옛날이다.


한편 선생님이 「메인 요리」에서 소개한 위화의 ≪인생≫은 꼭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화의 소설을 좋아하고 또 ≪허삼관 매혈기≫를 감명 깊게 읽은 탓도 있지만 '활착'이라는 단어 밑에 '살아진다는 것'이라는 해석을 붙였다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 왜 사느냐는 질문에 '그냥 살아'라고 대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쳤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라고 생각했다는 한 아이돌 그룹 멤버의  유서가 떠올랐습니다. 유서를 읽고, 활착이라는 단어가 삶에 던지는 의미를 생각하며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지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사는 것이라고요. 애착이라는 것이 유서를 남긴 꽃다운 나이의 그 청년에게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밖에도 선생님이 추천한 책들은 참 많았습니다. 그 책들을 다 읽으려면 아마도 평생이 걸릴지도 모르겠지요. 술술 읽히는 책들만큼 눈이 충혈될 정도로 이해가 안 되는 책들도 많을 테니까요.


선생님의 표현력은 제가 밑줄을 그으면서 읽을 정도였습니다. 단언컨대, 무라카미 하루키와 사노 요코 -공교롭게도 두 분 모두 일본 작가입니다-  그리고 장 그리니에의 책에 나온 표현들을 제외하고 이렇게 형광색으로 칠한 것은 선생님 책이 처음입니다.

온갖 아이디어들이 그물 위 멸치들처럼 후드득후드득 마구 튀어 오른다.


젊은이여, 어머니가 김치를 담그듯 나의 몸과 영혼을 버무려라.


선생님의 표현대로 그 에너지가 주는 긍정의 힘을 제 인생에 마구 버무리고 싶어 지는 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새 저는 또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요즘은 하나의 전공으로 평생 먹고 살 직장을 다닐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직장을 옮길 때마다 전공을 새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 간극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책이라고 하셨지요. 저도 그 말에 백분 공감하지만, 요즘 제가 새로 계획하고 있는 일은 여전히 제가 해왔던 일의 연장선 상에 있습니다. 새롭다 하는 이유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가면을 쓰고 다른 배역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 면.이라는 본질은 같지만 가면에 입혀진 색과 모양, 표정은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그 가면을 쓰기가 쉽지는 않네요.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어쩌면 저와 영영 맞지 않는 가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써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죠. 그 가면이 제 얼굴에 맞는 가면인지 절대로 적응이 안될 가면인지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책머리에 선생님께선 원래 문과를 지망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이과를 가게 되었고, 그 안에서 선생님의 길을 어떻게든 찾아내셨다고 하셨죠. 위화의 살아지는 활착처럼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선생님이 정말로 문과에 지망했다면 지금쯤 정말로 존경할만한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쩐지 그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선생님께는 결코 쉽지 않은 시간 들이었겠지만 저는 작가 최재천보다 동물행동학자이자 생태학자인 최재천이 더 매력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과학자는 동물의  마음을 읽을 줄 알고, 문학적인 시선을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뿐 아니라 타인의 전공에까지 던질 수 있으며 저렇게나 멋진 표현을 쓸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딱 ≪통섭의 식탁≫에 실린 선생님 삽화처럼 말입니다.


선생님을 알게 되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표지사진 출처 : 널예스 2017.12.19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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