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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어도. . . 괜찮습니다 ~




 형광펜을 들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마음에 드는 제목의 에세이는 책장 한 귀퉁이를 접기까지 했다. 마음에 드는 글귀에 밑줄을 그었다가는 책 전체가 노란색이 돼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샀을 때는 파스텔 톤의 산뜻한 겉표지에 재미있는 캐릭터가 고양이와 함께 어딘가로 두둥실 떠가는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어, 가볍게 읽을 수 있겠군 하고 생각했는데, 나의 생각은 보기 좋게 틀려버리고 말았다. 하늘빛이 어스름한 오늘 새벽이 되어서야 나는 나카시마 유 씨의 해설이 적힌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리고 이미 밑줄이 그어지고, 접히고, 읽은 곳을 표시하느라 수도 없이 접었다 폈다를 반복해서 처음의 빳빳했던 몸매를 잃어버린 책 앞날개를 다시 한번 찬찬히 훑어보았다.

 불룩해진 책 앞날개에서 사노 요코 씨가 "아무개 씨, 별 거 아닌 걸 가지고 부끄럽게 왜 그래?" 하고 물으며 턱에 손을 괸 채 나를 보며 수줍게 웃는 것 같았다. 이어서, "아무개 씨, 책은 하등 쓸모가 없어. 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그 독에 영혼을 빨리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했지? 시간만 허비하는 거야, 그럴 바엔 차라리 남자랑 노는 편이 훨씬 낮대도.('책을 가까이하지 말라' 中) 내 얘기도 다름없다니까?" 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와~ 내가 좋아하는 사노 요코 씨는 인상이 참 좋구나.' 책 앞표지의 사진을 보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녀의 글과 함께 그 해맑은 웃음이 가슴에 묵직한 통증을 남긴다. 그녀가 거쳐갔던, 그리고 아마도 내가 거쳐가게 될 '나이 듦'이라는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사노 요코 씨를 잘 모른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쓴 동화 , [백만 번 산 고양이] 하나뿐이다. 그마저도 정말 훌륭한 동화라는 스승님의 소개로 알게 된 것이고, 실제로 [백만 번 산 고양이]는 소장가치가 레벨로는 따질 수 없는 훌륭한 동화다. 그런 그녀를 나는 [문제가 있습니다]라는 이 에세이 한 권으로 하나 건너 친구를 알 게 된 것처럼 관심을 갖게 되고, 그저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그녀가 정말로 곁에 있다면 수줍기 짝이 없는 팬이 그렇듯 쭈뼛쭈뼛 다가가 한마디 말도 못 붙인 채 책만 불쑥 내밀어 싸인을 받아올 것 같다.


 나는 그녀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간 세대라는 사실과 가슴에 '어머니'라는 돌덩이를,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수석을 다루듯 매일 닦으면서 귀중히 어루만질 수도 없는 그런 존재를 품고 살면서 두 명의 남편과는 끝내 삶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홀로 어린 아들을 조바심 내서 키우며 뇌에는 자율신경 실조증이라는 병을 키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거쳐간 삶의 몇몇 단상들에 깊은 공감과 한숨 섞인 안타까움을 토했다. '대하드라마' 같은 삶을 산 그녀인데 어쩌면 저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어쩌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리라, 이 나이가 되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만일 이 책을 그녀가 말했듯 쓸데없는 짓만 했다는 청소년기에 읽었다면, 이렇게 오래도록 밑줄을 그어가며, 책장을 접어가며 읽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그런 면에서 '나이 듦'은 어쩌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사노 요코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지금도 당신의 책을 손에 든 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 어떻게 이 리뷰를 풀어야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당신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답니다. 당신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겠지만요.


 어쨌든 그녀의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하는 방법은 아마도 이 책에 적힌 몇몇 글귀를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굵은 쇠스랑으로 돌밭을 판 것 같은 인생을 살았던 그녀인데 그녀의 글은 어찌도 이렇게 가볍고도 산뜻할 수 있을까. 해설을 남긴 나가시마 유 씨의 말처럼, 사노 요코 씨의 글은 세세하게 살피는 자세가 드러난다. 하고 싶은 말 사이에 끼어 있는, 리듬을 주기 위해 넣은 듯한 그 세세한 부분이 거의 본체다. 실제로 내가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던 부분도 그 본체고, 책장을 아예 접은 부분은 에세이 전체가 본체나 다름없다. 그럼 이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런 본체 몇몇을 아래 적어볼까 한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진은 은색 풍선 같은 옷을 입은 인간이 달에서 걷는 사진이다. TV로 보면서 '너 거긴 뭐하러 갔어? 쓸데없이'라고 생각했지만, 남자들은 흥분했다.

중략

달은 자꾸만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달은 보는 것이다.
거기까지 가서 돌을 주워오는 건 미친 짓이다. 사람들에겐 해선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해선 안 되는 일만 하고 싶어 한다. 해버리면 당연한 게 된다.
우리에게 미래가 없어졌다. 미래가 다가오기도 전에 현실이 빠른 속도로 앞질러가기 때문이다. 자꾸만 앞질러 가는 현실을 따라가자니 숨이 찼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은 모두 과거가 되었다.

-'달님' 가운데    



성질은 평생 변하지 않으므로, 누구든 자기 성질이 불러들인 인생을 살게 된다.

중략

누구에게서 태어날지 아무도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이 가장 큰 운명이다.
가지고 태어난 성질의 핵심적인 부분은 바뀌지 않는다. 그게 더 큰 숙명인지도 모른다.

- '어머니에 대하여, 아버지에 대하여' 가운데



아름다운 인테리어로 장식하고 정결한 그릇을 고르는 건 많은 여자의 취미이다. 나는 그런 잡지를 즐겨 읽으면서도 지나치게 아름다운 사진에는 당혹감을 느끼곤 했다. 왠지 몸 둘 바를 모르겠고, 부끄러워진다. 하얀 원목 테이블에 자수가 놓인 테이블보라든지, 시트와 베개를 핑크 꽃무늬로  통일하는 짓은 못하겠다. 그래도 밖으로 나가면 거리에 가득한 아름다움을 거역할 수 없게 되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손에 넣으면 마음속으로 노래를 부른다. "당~신의 과거는 알고 싶지 않~아." 그러면 숫처녀인 척 남자를 속인 기분이 든다.

-쿠페빵과 <메콜즈> 가운데



예술과 신앙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밀어낸다. 예술이란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자아가 낳은 것이다. 신앙이란 자아를 버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예술은 거대한 진실과 거대한 거짓을 모두 품는다.
죽으면 인간성은 사라지지만, 표현된 것은 남는다. 재능이 크면 클수록 재능과 인격의 관계성은 옅어지는 것 같다.

-'지금, 여기 없는 료칸 스님' 가운데



아이를 위한 글은 새빨간 거짓말이어야 한다. 그 새빨간 거짓말에 이 세상을 정확히 꿰뚫는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 '진실'은 곧 현실이다.

-'아이와 같은 눈높이'로 가운데



아름다운 소녀도 아무 말하지 않는다. 오랜 망설임 끝에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만 한다.
대사는 코란 속 말씀뿐이고, 화면은 먼지 날리는 사막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마음만 생겨난다. 아무것도 없는 단순한 사람들이 마음만 무겁게 안은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다 보면, 온갖 물건과 색의 홍수 속에서 손톱까지 치덕치덕 화려하게 꾸미는 일본의 소녀들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없어도 사랑은 있다' 가운데



왜 뭉크는 쓸쓸한 그림만 그렸을까. 뭉크의 사진을 보고 이해했다. 굉장한 미남이다. 미남이 아닌 남자는 세상에 맞서기 위해 희망과 힘을 비축해둬야 하고 스스로 격려해야 한다. 그래서 바쁘다. 미남은 그런 것에 무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내면과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다. 내면과 진지하게 마주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있는 광기를 파내게 되는 것이다.

-'절규하지 않는 '절규'' 가운데


그 외에 '검은 마음', '선생과 스승', '의외로 근처에', '노인은 노인으로 좋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아 했던 에세이들이다.


 

엄마의 인생을 생각하면저도 피로해집니다.
"아 피곤하다. 엄마도 피곤하지? 나도 지쳤어. 같이 천국에 갈까? 대체 천국은 어디 있을까?" 하고 물었더니, "그래? 의외로 근처에 있는 모양이야."라고 작은 소리로 대답하더군요.

-'고바야시 히데오 상' 수상 연설 가운데


그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담았다는 에세이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가슴의 돌덩이가 더욱 깊숙하고 묵직하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다른 에세이를 읽는 데는 아마도 평소보다 더 단단하게 동여맨 심장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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