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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천천히 걸어라, 물을 많이 마셔라.




 이 책이 출간된 지 십 수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망설임 없이 샀던 기억이 난다. 리뷰를 쓰기 위해 최근에 다시 책을 꺼내 들었을 때는, 이제 막 결혼을 하고 시댁과 친정, 회사일과 남편과의 신혼을 모두 잘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난 기억들이 끓어 넘치는 죽처럼 한꺼번에 떠올랐다. 세상에, 끓어 넘치는 죽이라니, 아줌마가 되니까 이런 표현을 참 잘도 쓰는구나 싶다. 


 나의 연인 하루키 씨 -미안합니다, 하루키 씨. 멋대로 혼자 연인 운운해서.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멋진 글을 쓰지만 않았어도, 솔직히 당신도 내 타입이 아닙니다. ^^;  -에 대한 것이라면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설렌다.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나에게 하루키는, 하루키 문학은, 젊은 시절을 온전히 젊은 시절로서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준 기폭제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둠의 저편」 리뷰는 이 책을 다 읽고 곧바로 한 차례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적잖이 당황한 상태여서 쉽사리 글을 쓸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오늘 리뷰는 당시 내가 당황했던 이유를 서두로 쓸까 한다.


 하루키 마니아라면 모두가 알겠지만, 하루키의 글쓰기 방식은 어느 순간  -그 어느 순간이, 하루키 문학 인생에서 전환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  1인칭의 나에서 3인칭의 그(혹은 그녀)로 바뀌었다. 그 시점이 아마도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의 "벌꿀 파이"에서부터가 아닐까 싶은데, 하루키 자신도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선을 돌리고 싶다고 말한 바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당황한 이유 역시 하루키의 시점이 내가 아닌 그들에게로 바뀐 것 때문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어둠의 저편」은 주인공 마리의 시선(하지만 그 시선을 보고 있는 것은 작품밖에 있는 누군가이고, 그 누군가가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을 따라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을 읽고 처음에는 그 당혹감에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하나 고민이 깊었다. 당시에는 1인칭 화법으로 진행된 하루키의 이야기에 이미 너무 길들어있던 터라, 카메라 화법으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마리에 대해 첫 문장을 쓰는 것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깐 동안 책 뒤에 수록된 작가들의 평과 옮긴이의 평,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리뷰어들의 글을 하나씩 꼼꼼히 읽어봤다. 나쁜 평도 있었고 하루키가 역사에  남을 거장이 되기 위해 한 발짝 더 가까이 가고 있다고 격찬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평은 모두 하나같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평들을 읽은 뒤부터 더는 책에 대해 리뷰를 쓸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도무지 앞으로 쓰게 될 리뷰에 감정을 이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어찌어찌 쓰더라도, 그건 다만 다른 이들의 평이 나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일 뿐, 알맹이가 빠진 리뷰가 될 터였다. 아하, 이게 이런 내용이었구나 하고 알게 된 순간, 책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상상력은 쉬익! 하고 증발하고 교과서적인 분석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 건 아무리 저항해도 어쩔 수 없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일이다. 난 곧 전문가들의 평을 읽은 것을 후회했고, 지금까지 어둠의 저편을 손도 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른 것이다.


 여하튼 지나간 이야기는 이제 그만두고 책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를 하자면,「해변의 카프카」에서도 그랬듯 주인공 마리는 이야기를 묘사하는 작품 밖 누군가에 의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의식 = 마리의 의식 ∃ 그들의 이야기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작가의 의식 ⋀ 마리의 의식 ∃ 그들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작가와 마리는 대등한 입장인 동시에 서로 독립적으로 카메라 워킹을 하는 관계다. 둘의 카메라 워킹이 하나로 편집될 때 "그들"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구조다. 그래서인지 가끔 마리와, 마리가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에 어떤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그 순간이 바로 소설 밖 작가의 의식이 작용했을 때다. 거리감을 느낀다는 것은 사실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하고, 좋은 현상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조금 더 분석적이며 냉철하게, 한마디로 분별력 있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관찰자가 되어 그들을 분석하는 것보다는 1인칭인 나의 시점에서 직접 부딪히고 견디고 이겨나가며 상황을 분별력 있게 바라보고 그들을 이해하는 편이 감정적으로 훨씬 자연스럽다. 물론 그럴 경우엔 지나치게 몰입하게 되어 불가피하게 감정 소모를 겪게 되기도 하지만, 역시 그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나는 분명 이 3인칭 시점이 불편했고 지금도 그런 면이 다분히 있다. 그건 어쩌면 개인의 취향이거나 성향일 수 있는데,  내 경우엔 직접 생각하고 판단하고 흔들리고 바로 서고 하는 것이 훨씬 덜 답답하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다친다 해도 어느 방향으로든 조금 더 나은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사라진 아내를 찾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겪은 일들을 쓴 「태엽 감는 새」나 「상실의 시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양을 쫓는 모험」을 내가 좋아하는 것인지도.  특히「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어둠의 저편」은 마리가 카메라의 시선이 되어 주변의 일들을 당황스러울 정도로 묘사한다. 자세한 묘사지만 차갑고 건조한 느낌에 무척이나 괴리감이, 그리고 묵직한 답답함이 느껴진다(그것이 하루키가 의도했던 방향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어쨌든 책을 읽는 동안 저런… 이 일을 어쩌나… 하게 되어 버린다. 아, 이거 답답한데, 어쩌나. 그리고, 이건 좀 지겨운데… 하는 느낌.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도대체 왜 이런 묘사를 해 놓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읽는 동안에는 조금 짜증이 나는 게 사실이다. 반면 러브호텔 직원으로 나오는 고오로기와 주인공 마리와의 대화는 썩 마음에 든다. 하루키의 익숙한 느낌이 살아나서라고 생각한다. 주변 인물을 내세워 주인공이 깨달아야 할 부분을 한차례 퍼붓는 소나기처럼 쏟아놓고 간다. 소나기는 그쳤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비 냄새가 남아 있는 그런 느낌 말이다.


 잠시 보여주자면,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 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 화보나,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나, 불에 태울 때면 모두 똑같은 종이 조각일 뿐이지. 불이 '오. 이건 칸트로군.'이라든가, '이건 요미우리 신문의 석간이군'이라든가, 또는 '야, 이 여자 젖통 하나 멋있네'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고 있는 건 아니잖아. 불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 것이든 모두 종잇조각에 불과해. 그것과 마찬가지야. 중요한 기억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기억도, 전혀 쓸모없는 기억도, 구별할 수도 차별할 수도 없는 그저 연료일 뿐이지."

중략

"만약 그런 연료가 내게 없었다면, 그래서 기억의 서랍 같은 것이 내 안에 없었다면, 나는 아마 옛날에 뚝 하고 두 동강이 나 버렸을 거야. 어딘가 낯선 곳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길바닥에 쓰러져 개죽음을 면치 못했겠지. 중요한 것이든 아무 쓸모없는 것이든, 여러 가지 기억을 때에 따라, 꺼내 쓸 수 있으니까, 이런 악몽 같은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야. 더 이상은 안 돼, 더 이상은 못해, 하고 생각하다가도, 어떻게든 그 난관을 넘어설 수 있는 거지." 

- 고오로기의 말 중에서


 이 책은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보다는 도대체 왜?! 이런 상황을 설정하고 묘사하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계속 품고 읽어야 하는 책인 것 같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마리라는 10대 소녀가 하루 밤 동안 어디에 있었고 누구를 만났고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무엇을 생각했느냐를 적어 놓은 책이다. 하지만 그 하룻밤이라는 시간 속에는 인간의 주체성을 뒤바꿀 만큼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어 함부로 책장을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내용이 여러 평론가들의 글에 실려있다 (역시나, 십수 년이나 지났어도 평론가들의 말은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건 맞는 말이다. 하루 밤의 이야기지만 한 인간의 평생이 그려진 것 마냥 많은 의미를 담고 있고,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세계관이 강한 메시지로써 전달되고 있다. 그런 사건들이 이야기 속에서 일어나고, 다양한 인물들이 독자의 모습을 반영해주기도 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하루키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는 여전히 어딘가로 가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걸어온 세계를 빠져나갈 마지막 문틀을 세우고 있을까. 최근에 출간된 여러 권의 책을 보면 후자 쪽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라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조마조마해지는데, 또 한 편으로는 그가 그동안에 작품 속에 언뜻언뜻 내비쳤던 소년의 동심이 현실적으로 더 가까이 묘사되는 것 같아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 그의 행보가 어디로 향할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편에 서고 싶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또 다른 그의 차기작을 만나보고 싶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은, 「해변의 카프카」, 「1984」,「기사단장 죽이기」,「태엽 감는 새」 같은….


하루키 씨, 그래 주실 거죠?


 아참, 그리고 참고로 나는 새로 나온 책 표지보다는 2005년의 표지가 훨씬 좋은 것 같다. 뭐랄까, 소설의 분위기와 조금 더 맞는다고나 할까….


이 표지 말이다.


어둠의 저편 / 2005년 판본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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