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
<내가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라고 쓰기 전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뒤에도 나는 이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으며 내 친구를 위해 - 그야말로 기뻐하며 -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믿는다. 독일을 위해 죽는 것이 달콤하고 옳은 일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듯, 나는 내 친구를 위해 죽은 것도 달콤하고 옳은 일이라는 데에 동의했을 터였다. 열여섯 살에서 열여덟 사이에 있는 소년들은 때때로 천진무구함을 심신의 빛나는 순결함, 완전하고 이타적인 헌신을 향한 열정적인 충동과 결부시킨다. 그 단계는 짧은 기간 동안에만 지속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강렬함과 독특함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귀중한 경험 가운데 하나로 남는다.
- 한스 슈바르츠의 회상 가운데.
열여섯에서 열여덟 사이의 나이는 어떤 주문에 걸린 것처럼 결계가 쳐져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보다 어린 열셋에서 열다섯 사이가 순결한 이상이 만들어낸 무지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나이라면, 열여섯에서 열여덟은 현실을 이상화하는 구간이다. 『동급생』의 화자 프레드 울만은 바로 그 구간에 있는 두 소년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두 소년의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 책은 서두에 아서 쾨슬러와 장 도르메송의 책에 대한 헌사를 싣고 있다. 나는 책을 읽기 전에 책 말머리에 다른 작가의 서문이 실려있는 것을 꽤 좋아하는 편인데, 그 서문을 통해 또 다른 작가를 알게 된다는 즐거움 때문이다. 장 그리니에의 『섬』서문을 통해 만난 알베르 까뮈와 앙드레 지드가 그랬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알게 된 존 어빙, 사노 요코의 책에 나온 미야자와 겐지, 그리고 이번 『동급생』의 서문에 등장한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가 그렇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장 도르메송은 『동급생』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20년쯤 전, 한 친구 덕분에 관심이 끌려 이 작은 책을 처음 만나게 되었던 때를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기쁨과 고통이 마음속에서 강렬하게 뒤섞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데도 미소를 짓고 있었던 때를.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서 계속 읽어 나갈 수가 없었음에도 커다란 행복감이 나를 휘감았던 때를. 마치 지옥 불길 속에서 천사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 같았던 때를.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그처럼 큰 충격을 느꼈던 것은 두세 번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도 아이작 B. 싱어의 『깃털 왕관』, 그리운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아라공이 공산주의로 전향하기 전 젊은 초현실주의자였던 시절에 쓴 기괴한 이야기인 『파리의 농부』를 읽었던 때가 그랬을 것이다.
나는 장 도르메송의 이 헌사를 통해 아이작 B. 싱어의 책 두 권을 손에 넣게 되었고, 언젠가는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를 읽기 위해 중고서점을 뒤져 위시리스트 목록에 책을 담아 놓았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앉아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을 결. 국. 에. 는. 그가 느꼈던 방식 그대로 느끼고 있다.
내가 결. 국. 에. 는.이라고 하는 이유는, 책 서문을 통해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알게 되는 기쁨과 같은 무게로, 때때로 그 서문으로 인해 책에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건 단지 내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지 일반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고, 정확히 장 도메르송이 서문에 언급했던 것과 일치하게 전율과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은 주문의 결계가 시작되는 열여섯이라는 지점을 막 지나온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두 소년의 나이에 결계가 쳐졌다고 하는 이유는 인간 역사상 가장 끔찍한 시기로 일컬어진 나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두 소년이 맺어나가는 시적이며 철학적인 우정이 모든 현실을 이상화하는 열여섯에서 열여덟이라는 결계가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레드 울만은 두 소년의 우정이라는 주제와 나치시대라는 배경을 절묘하게 뒤섞어 아주 섬세하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가령 이야기의 화자인 한스 슈바르츠의 출신 배경을 유대인 의사의 아들이자 랍비의 손자로 두고 그가 유일하게 친구로 삼고 싶은 매력적이며 귀족적인 소년 콘라딘 폰 호엔펠스를 독일 역사에서 뼈대가 굵은 가문의 후손으로 정한 것부터가 그렇다. 도입부에서 화자는 아무런 수식어 없이 "1932년에 그가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는 말로 친구에 대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시대적인 배경이 나치즘이 발흥하던 1930년대 초반임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우정은 곧 휩쓸리고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성난 파도 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화자인 한스는 독일을 떠나온 지 3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 나치시대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떠난 이래로 나는 가능한 독일인과의 만남을 피했고 독일어로 되어 있는 책은 단 한 권도, 휠더린의 시집마저도 펼쳐보지 않았다.
(중략)
나는 그들과 악수하기에 앞서 그들의 전력을 확인했다. 독일인을 받아들이려면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나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내 친구나 친척의 피를 손에 묻히지 않았다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중략)
내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독일을 떠올리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격이다.
-한스 슈바르츠의 회상 가운데
이 짧은 한마디 회상을 통해 우린 역사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길 수 있는지 감히 짐작해볼 수 있다. 뜻 모를 화재로 목숨을 잃은 이웃집 아이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서, 오페라 홀에서의 사건으로 호엔펠스 가문이 유대인을 멸시한다는 사실을 고백한 콘라딘의 절망적인 외침 속에서,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콘라딘에게 폰이라는 작위가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멸적 이리만큼 깍듯한 자세를 취하는 한스의 아버지를 통해서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스를 멸시하는 반 아이들의 태도에서, 그들이 하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나치즘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부조리와 잔학성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아서 쾨슬러의 헌사에서처럼 우리가 이 이야기에 한 편의 음유 시 같은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한스의 기억이 콘라딘과 함께한 포도밭과 과수원, 웅장한 성채와 평온하고 푸르른 슈바벤의 언덕, 호박 빛깔 수지와 버섯 냄새를 풍기는 짙은 숲, 그와 함께 나누었던 철학적 대화들과 가슴 벅찬 우정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동급생』을 읽으면서 한 가지 더 반가웠던 것은 소설의 문체가 그 옛날 내가 학창 시절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니, 아르튀르 랭보, 장 그리니에, 버지니아 울프의 문체처럼 고풍스럽고 서정적이라는 것이다. 요즘 번역되는 외서들을 보면 문장이 지나치리만큼 세련되고 단순 명료한 경우가 많은데 읽을 때는 뇌리에 금방 각인되고 쉽게 읽힐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물론 좋은 문장은 어려울 이유가 없다- 고풍스러운 문체가 주는 비밀스럽고 고상한 느낌을 느낄 수가 없어 여운이 없다고나 할까. 깔끔하게 똑 떨어지는 느낌이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쓰이는 말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아쉬울 때가 있다. 이 짧은 이야기가 다 읽고 난 뒤에도 여운이 남는 이유는 프레드 울만이 마지막에 남겨놓은 결정적인 장치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 소년의 우정을 고풍스럽고 서정적인 문체로 묘사했기 때문이라고도 얘기하고 싶다.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춰 이 책을 읽는다면 신앙과 이데올로기와 철학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던 시대에 살았던 두 소년의 감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때때로 우리는 검은 숲에 가기도 했다. 호박 빛깔 수지와 버섯 냄새를 풍기는 짙은 색 나무들 사이로 송어 개울이 흐르고, 그 둑에는 목재소들이 늘어서 있었다. 또 때로는 먼먼 산꼭대기까지 돌아다니며 저 멀리서 푸르스름하게 급류로 흐르는 라인 강 계곡과 프랑스 동북부의 희푸른 보주 산맥과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을 바라보기도 했다. 아니면 네카어 강이 이처럼 우리를 유혹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전령인 부드러운 미풍이여
그 모든 미루나무와 함께하는 사랑스러운 강이여
p.57
사실 나는 내 뿌리를 바르바로사까지 더듬어 올라갈 수는 없었다. 어떤 유대인이 그럴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슈바르트 집안이 여기 슈투트가르트에서 적어도 2백 년, 어쩌면 그보다도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어떤 기록에도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그들이 어디에서 ― 키예프나 빌뉴스나, 톨레도나 바야돌리드에서 ― 왔는지를 어떻게 아느냐고? 예루살렘과 로마, 비잔티움과 쾰른에 있는 버려진 무덤들 중 어디에서 그들의 뼈가 썩어 가고 있느냐고? 그들이 호엔펠스 이전에는 여기에 없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냐고? 하지만 그런 질문들은 다비드가 사울 왕에게 불러주었다는 노래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여기가 시작도 끝도 없는 내 나라, 내 집이며,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붉은 머리가 아니라 검은 머리로 태어났다는 사실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pp. 80-81
마지막으로 다른 작가가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새로운 책이 무엇인지 궁금하다거나 책에 대한 평이 궁금해서 못 견딜 정도가 아니라면, 이번 『동급생』은 서두에 나오는 1977년판 아서 쾨슬러의 헌사와 1997년판 장 도르메송의 헌사는 건너뛰고 본문으로 넘어갈 것을 제안해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두 소년의 우정이 이끄는 대로 결말을 향해 나간다면 그 감동은 아마 배가 되리라고 확신해본다. 서문을 다 읽고도 감동과 전율이 일었으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느끼는 감동과 전율은 어떨지….
책을 앞에 놓고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도 한스가 느꼈을 삶에 대한 고독과 짙은 그리움과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를 위해 기꺼이 죽어줄 수 있는 그 친구가, 나는 원망스럽고 원망스러우며 미치도록 그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