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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교 이야기

2. 기독교 이야기




유대교 이야기에 이어 기독교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한다.

유대교 이야기는 므두셀라 나무로 시작을 했는데 기독교 이야기는 어떤 소재로 말머리로 시작할까, 고민을 해보니 결국 가장 좋은 것은 역시 크리스마스가 아닐까 싶다.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어른 아이 할 없이 모두가 즐기는 행사기 때문이다. 



출처 : Pinterest PicMix



앞선 글에서 유대교에서는 유대교 경전인 토라의 필사자 모세를 신성시하거나 생일 기념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건 토라가 유일한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통해 모세에게 전달된 것뿐이고, 모세는 단지 전달자의 신분으로 다른 모든 유대인들과 평등한 위치에 서 있다는 사상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예수는 유대교의 모세와는 다른 입장에 있다. 기독교에 있어 예수는 예수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부터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 스갸랴를 통해 예언된 메시아, 히브리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승인을 얻었다는 뜻이다. 구약 시대에는 예언자, 사제, 왕에게도 기름부음 받은 자의 자격을 주었지만 예수가 특별한 이유는 문자적인 기름부음이 아닌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3: 16-17).


다시 말해서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칭호 자체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예수의 위치가 이렇다 보니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기념일을 크리스마스로 지정하고 지키고 있다. 하지만 정작 예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12월 25일 한겨울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성경에도 예수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 나와있지는 않는다. 다만 누가복음 2장 6-8절에 예수가 태어날 당시 그 지방의 목자들이 집 밖에서 지내면서 밤에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자가 집 밖에서 지낸다는 말은 예수가 태어날 당시의 계. 절. 이 겨울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지방의 계절은 겨울 우기가 11월부터 3월까지 이어지고, 여름 건기가 6월부터 10월까지 이어진다. 겨울철 기온은 0도~9도를 웃도는 정도로 다습하고 여름은 아무리 더워도 20도 안팎의 건조한 날씨다.


그런데도 그동안 크리스마스를 예수님의 탄생일로 알았던 이유는 고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의 인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네 개로 분리된 제국의 사상적 통일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하고자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 아우구스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기도 했고,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에게 무자비했으나 말년에 방향을 바꿔 기독교인에게 관용을 보인 갈레리우스 황제의 유언으로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13년 밀라노 칙령을 내리면서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른다.


크리스마스는 네 개로 분리돼 있던 로마를 통일하기 위해 그동안 로마에서 믿었던 태양신의 축일을 예수의 탄생일과 오버랩시켜 만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태양신과 유대인들에게 의의 태양으로 불렸던 예수를 같은 존재로 만듦으로써 로마 제국 인구의 20퍼센트나 되는 유대인들을 흡수하려고 했던 것이다.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기독교를 공인해 축일까지 만들기는 했지만 그 후에도 콘스탄티누스는 선왕이 믿었던 태양신 미트라를 계속해서 섬겼고, 이 때문에 미트라 신앙의 의식이나 제도 관습, 교리 등이 초기 기독교에 대부분 수용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라든지, 겨우살이, 푸짐한 선물 등이 모두 태양신 미트라의 축일과 관련된 관습들이다.


이제 서기 313년 이전으로 돌아가 예수가 탄생하고 기독교가 자리를 잡게 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2. 기독교 이야기




성유물 십자가 : 왕좌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상하좌우의 원형 장식에 그려진) 네 명의 복음서 저자 / 출처: 네이버 미술 백과




기독교의 등장은 예수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다. 메시아인 예수의 출현은 구약 시대 창세기로부터 이사야와 예레미야, 다니엘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예언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유대교는 태고 때부터 메시아가 출현해 모든 인류를 구제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왜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따로 분파해서 등장하게 되었을까? 유대인들은 1차 이산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치하 → 그리스 속국 → 로마 속국이 되면서 로마 제국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이 과정에서 유대교 안에서 여러 종파가 생겨나는데 대표적으로는 최고 정점에 친로마 파인 헤롯당과 사두개파가 있었고, 바리새파와 열심당원들, 에세네파가 등장했다. 이 유대교의 종파를 알아두는 것은 중요한데 훗날 예수의 죽음과 기독교의 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헤롯당은 헤롯 왕가의 지지자들이며 사두개파는 구전 율법을 배척하고 오로지 모세 오경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여 대제 사직을 맡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다. 반면 바리새파는 민중의 지지를 받던 종파였는데, 이들은 성경과 구전 율법을 모두 지켰다. 바리새파는 반로마적이었지만 무력사용에는 반대했고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자만적이고 독선적이었으며 일반 사람들을 멸시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적용하는 일에 있어 편견에 사로잡혀 왜곡된 사상을 강요했다. 또 정작 자신들은 모순적이게도 율법과는 정반대로 돈과 지위를 사랑했다.


열심 당파는 유대인의 독립을 무력에 호소하는 종파였다. 후에 이 열심 당파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은 2차 이산을 겪게 된다. 에세네파는 속세를 버리고 황야와 사해 부근 쿰란에서 금욕적 공동체 생활을 하는 종파인데, 예루살렘 성전이 사악한 제사장들 때문에 더럽혀졌다고 생각했다.



마에스타,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 장식화, 뒷면, 그리스도 수난의 장면들을 기록한 총목록 : 빌라도 앞의 그리스도와 헤롯왕 앞의 그리스도 / 출처: 네이버 미술사전



한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고, 구약시대부터 있어온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일치하게 등장한 예수는 이 종파 가운데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았다. 예수는 율법에 구속되어 있던 다른 종파와 다르게 '사랑과 박애와 평등'을 전파하고 다녔다. 당시 유대인은 종파를 막론하고 율법의 형식에 얽매어 있었는데 특히 할례 부분에 있어서 그리고 성선벌악의 사상적인 측면에 있어서 엄격했다. 유대인에게 있어 하느님의 축복은 할례 받은 유대인에게만 유효했고 율법을 지키는 선한 사람은 구원의 상을,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병들고 아프고 어려운 것은 그가 지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사두개파의 제사장들이나 바리새파의 거만한 율법학자들보다는 신분이 낮고 비천하고 겸손한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려 다녔다. 예수의 초기 제자들인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안드레도 어부 출신이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예수는 율법과 할례 없이도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면 누구나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복음을 전파하고 다녔다. 가난하고 평범한 민중들은 세례 요한이 예언한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고 믿으며 따르기 시작했다.



출처: 네이버 미술사전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파가 보기에 예수의 복음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유대인에게 율법과 할례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계율이자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구분 지어주는 정체성, 절대적인 종교다. 그런 이유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주축이 되어 비천한 자들과 어울리는 예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예수가 보여주는 모든 행적들이 율법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그동안에 그들이 쌓아온 부와 명예가 예수로 인해서 무너져 내릴까 봐 두려워했다. 결국 유대교 종파에서 헤롯당, 바리새파, 사두개파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힘을 빌어 반역자라는 명목으로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몬다 (마태 16:16, 마가 3:6 ).


「세 종교 이야기」에는 예수의 죽음에 관여한 종파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만 언급되어 있지만, 성경을 보면 헤롯당도 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예수께 세례를 베푼 세례자 요한이 속세를 버리고 금욕생활을 하던 종파인 에세네파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에세네파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측에 힘을 싣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에세네파의 금욕적인 생활과 교리를 살펴보면 예수의 복음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바리새파와 헤롯당, 사두개파의 공모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후, 예수의 추종자들은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때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열렬한 바리새파의 한 사람으로서 성경에 정통했다. 사울이 다마스쿠스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감옥에 가두기 위해 길을 떠났을 때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로 개종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인 박해자였던 사울이 바울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사울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예수의 가르침을 이방인에게 전파하는 사도가 된 후로 그리스식 이름 바울로 불렸다.



프랑스의 화가 푸생(Nicolas Poussin)의 작품. 성 바울의 법열 / 출처 : doopedia.co.kr



바울이 환영을 경험한 일은 이후 유대교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그동안에는 예수를 따르는 초대 기독교 모임과 유대교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비록 정통 유대교에게 박해를 받기는 했지만 초대 기독교 성원들은 자신들을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만 생각했다. 정통 유대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고 언젠가는 유대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는 믿음뿐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정통 유대교와 초대 기독교를 구분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하느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율법이나 토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토라에 나오는 윤리적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의롭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노력만으로 정의에 이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예수의 죽음이 헛되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었다. 바울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예수를 통해 죄를 회개한다면 이방인들도 유대인처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처음엔 자신들을 유대교의 한 종파라고 믿던 초기 예루살렘 교회와도 부딪혔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나사렛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나사렛 파'라고 불리기도 했었는데, 베드로가 그 중심에 있었다. 성경에도 베드로와 바울의 충돌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는데(갈라디아 2:14) 바울은 유대 기독교 예루살렘 교회들이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라고 비난했고, 유대 기독교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을 유대교 전통을 파괴하는 인물로 보았다.


이 둘의 대치는 결국 할례 문제로 정점을 맞게 되는데, 바울이 선교여행을 떠난 사이 예루살렘에서 온 신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안티오카 교회(바울을 따르는 무리)에 와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요한 일이 있었다. 결국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예수의 형제 야고보의 주재로 가톨릭교회 첫 사도회의(사도행전 15:6)가 열리게 된다. 베드로는 이 사도회의에서 바울의 손을 들어준다. 베드로는 이미 하느님의 환상을 통해 이방인을 구원하는 신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성령을 받았고, 예수도 이방인들에 대해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공표했다. 그 뒤 초대 기독교에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기하습수적으로 늘기 시작하고, 초대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는 결코 섞이거나 편입될 수 없는 극명한 교리상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중 고대 기독교 예술사



이렇듯 바울이 유대 종파의 하나라고 생각했던 나사렛 파를 정통 유대교와 확연히 구분되는 새로운 종교로 재정립한 이후, 기독교는 에게 해 지역의 여러 사람들에게 전파되면서 유대교로서 갖고 있던 관행이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유행하던 영지주의, 스토아 자연철학, 로고스, 플라톤 등의 사상과 접목되어 유대인만을 위한 기독교가 아니라 보편적인 기독교로 자리를 잡게 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교리상의 차이로 유대교와도 반목했지만 로마제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인들에게 갖은 핍박을 받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일 뿐이며 로마제국의 수호신인 황제를 숭배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은 제국의 안녕을 위협하는 반국가적인 행위였다. 자연히 나라에 큰 재난이나 비운이 발생할 때마다 로마인들을 기독교인들의 탓으로 돌리고 박해를 가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서기 64년의 로마 대화재다. 로마인들의 박해는 초기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대교에게도 해당됐기 때문에 유대인과 초기 기독교는 로마제국 치하에서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의 중심에는 열심 당파가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의 반란으로 이스라엘이 2차 이산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는 미리 내다봤다.



허버트 로버트 <로마 대화재>(1975) 출처: 세 종교 이야기



유대민족은 서기 66년부터 7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로마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3차 반란 전쟁의 막바지에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자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말을 기억하고 요르단 강 동편의 펠라 성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누가복음 21장 20-24절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으로 도피를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보기에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탈출로 목숨을 연명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변절자 들일뿐이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초기 기독교인 나사렛 파를 비겁한 배신자로 보고 자신들의 신앙공동체에서 초기 기독교를 완전히 배제하기에 이른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반목을 하게 된 계기가 여기에 있다.


3차에 걸친 로마와의 전쟁으로 유대민족은 삼분의 이가 멸절되었고, 모든 종파가 와해되었다. 유일하게 바리새파만 남게 되었는데, 전쟁통에 제사장 계급이 전멸당하자 유대교에서는 랍비들이 주도하는 랍비 유대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한편 살아남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인들의 박해를 피해 지하묘지 동굴에서 은밀하게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카타콤(지하묘지 동굴) /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상당히 정치적이었다. 앞서 얘기했듯 로마는 수많은 황제가 자리바꿈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런 혼란을 잠재운 장본인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는데, 서기 313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다. 기독교를 이용해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어 있던 로마를 통일하고 직접 교회를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입장에서는 거의 신과도 같은 특권을 얻게 된 것이다. 기독교 입장에서도 그동안에 박해를 당하며 숨어 지냈는데,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으니 나쁠 것이 없었다. 반면 2차 이산으로 이미 소수로 줄어든 유대인들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구약성경을 주축으로 한 율법 외에는 거짓 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 내에서도 뜨거운 논쟁이 되었던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의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니케아 공의회를 주재했다. 당시 기독교 내에서는 예수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 파와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 본질인 동시에 아들이며 하느님의 피조물이 아니라고 하는 알렉산더 파로 나뉘어 있었다. 아리우스 파는 예수가 피조물로써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할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알렉산더 파는 예수야말로 유일한 구원자라고 설파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입장에서는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교리가 빨리 통일되고 확립돼야 했다. 그래서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이 두 종파의 교리를 절충할 수 있는 '삼위일체'를 기독교의 기본골격으로 채택했다. 삼위일체의 기본골격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낳으신 분이며 만들어지신 분이 아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한 본질이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두 종파는 이 니케아 신조에 서명하고 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출처: 독서신문 2015년 1월 21일 자 기사



이후 기독교는 다양한 정치상황과 종교적, 국가적 이념에 따라 교리상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분열하고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운 발도파니 루터파, 칼뱅파가 등장한다. 그 과정에서 성경의 원문이 필사되고 여러 경외서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한 의견 대립이 끊임없이 생겨났다. 기독교는 끊임없는 대립과 변화를 겪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세 종교 이야기」에서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기독교의 발자취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너무나도 많은 역사적 사건들, 정치적 이념들과 종교적 이념들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책으로 펴내기에도 모자라기 때문일 거라 여겨진다. 기독교의 변화만을 설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기에 「세 종교 이야기」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분열 과정과 확립된 정황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나와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독립되어 나왔는지, 또 그들의 관계가 어땠는지, 반목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 자체만으로 종교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고 지금의 사회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세 종교 이야기」의 기독교 편을 읽고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신약성서에는 예수가 분명 하느님의 승인받은 메시아이며 인류는 그분의 희생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어째서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과 토라만을 고집하는 걸까? 구약성서에서 맥락을 달리하지 않고 꾸준히 나오는 얘기가 메시아에 대한 계시다. 구약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유대인이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메시아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예수와 함께 한 제자들은 예수의 행적과 복음을 들으며

예수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전파 활동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어째서 예수와 하느님을 동일 인물로 보는 니케아 신조에 동의하고 삼위일체를 받아들였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삼위일체는 예수가 복음을 전하면서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한 것과 일치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죽는 순간까지도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누가 22:42)"라고 기도하면서 분명히 자신과 아버지인 하느님의 존재를 구분 지었다. 


또 한 가지는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나 이외의 우상은 숭배하지 말라는 하느님이 말씀과 어긋나게 사도들을 기리는 교회당에서 그 상징물에 절을 하거나 키스를 하는 행위, 고통을 통한 구원의 징표라고는 하지만 십자가라는 또 다른 형상을 만들어 숭배 행위를 하는지 그것이 옳은 일인지 의문이 생겼다. 모세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송아지 숭배에 하느님의 이름을 걸어놓았지만 하느님은 그러한 숭배 또한 우상숭배의 또 다른 모습이라 노하며 그들을 정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출애굽기 32:3-10, 이사야 42:8).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제국을 통일하려는 목적으로 태양신의 축일과 예수의 탄생일을 일치시켰다는 점에서도 그 후에 태양신의 여러 관습을 기독교에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도 여러 가지 해결되지 않는 의문점이 생긴다.


인문서적을 읽은 뒤에 단순히 내가 읽은 책이 어떤 내용인지, 흐름은 어떻고 좋은 점은 무엇인지 혹은 나쁜 점은 무엇인지 얘기하는 것이 가장 간결한 책 소개가 될 테지만, 이번 「세 종교 이야기」의 경우에는 그런 단순한 소개가 그토록 어렵기만 느껴진다. 그래도 이 리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역사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 내가 발 담고 있는 현재가 어느 방향에서 와서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고찰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는 개인적인 바람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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